국내외 고추 농가에 심각한 피해를 안겨온 탄저병이 올해도 어김없이 농업인들의 근심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연평균 20~30%의 수확량 감소를 야기하며 연간 1,000억 원 이상의 경제적 손실을 초래하는 이 병은, 특히 이상기후 현상으로 인해 그 피해 규모가 더욱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과거에는 특정 부위의 감염에 국한되었던 방어 체계가 이제는 식물 전체로 퍼져나가는 양상을 보이면서, 농촌진흥청은 이러한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인 메커니즘 규명에 나섰다.
농촌진흥청 연구진은 탄저병균에 감염된 고추 부위뿐만 아니라 감염되지 않은 다른 조직까지 병에 대한 저항성을 갖도록 유도하는 새로운 생리적 신호 전달 경로를 세계 최초로 밝혀냈다. 이는 식물호르몬인 살리실산(SA)을 기반으로 하는 복잡한 신호 조절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연구는 2022년 탄저병 저항성 품종과 감수성 품종의 유전체 및 유전자 발현 분석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탄저병 저항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유전자 ‘CbAR9’을 발굴하는 데 성공했으며, 후속 연구를 통해 이 CbAR9과 상호 작용하는 단백질 ‘CbSAHH’을 분리하여 그 기능을 검증하는 데 집중했다.
연구 결과, CbAR9과 CbSAHH의 상호작용은 병원균 침입 부위에서 이동성 면역 신호물질인 메틸살리실산(MeSA)을 합성하는 촉매 역할을 했다. 합성된 MeSA는 식물체 내 다른 조직으로 이동하여, 이미 감염되지 않은 부위까지도 탄저병에 대한 저항성을 갖도록 유도하는 ‘전체저항성(Systemic Acquired Resistance)’ 메커니즘을 발현시키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식물체가 특정 부위의 병원균 침입 정보를 식물체 전체로 전달하여 미감염 조직의 방어력을 높이는 현상으로, 고추 탄저병 면역 반응의 새로운 원리를 밝혀낸 중요한 성과이다. 이번 연구는 식물 과학 분야의 저명한 학술지인 Plant Physiology(IF 6.9)에 게재되었으며, 생물학연구정보센터(BRIC)의 ‘한국을 빛내는 사람들(한빛사)’에도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농촌진흥청은 이번 연구 결과가 향후 탄저병 저항성 고추 품종 육성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특히 메틸살리실산 유사 물질 등을 활용하여 식물체 내 탄저병 저항성을 증진시키는 새로운 농약 개발이나, 특정 신호 조절 유전자 정보를 활용하여 저항성 유전자를 가진 고추 품종을 더욱 정확하고 신속하게 선발할 수 있는 표지 개발에 직접적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농촌진흥청 디지털육종지원과 권수진 과장은 “이상기상으로 인한 탄저병 피해가 더욱 심화될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저항성 품종 개발에 필수적인 저항성 유전자 발굴과 그 기능 검증 연구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며, “앞으로도 이러한 연구를 활발히 수행하여 기후 변화에 강한 품종 개발에 적극적으로 기여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