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릉이 특별한 여행 프로그램으로 재탄생하며 방문객들에게 새로운 역사 체험을 제공한다. 문화유산청 궁능유적본부는 11월 10일까지 총 22회에 걸쳐 ‘2025년 하반기 왕릉팔경’ 프로그램을 운영한다고 밝혔다. 이 프로그램은 조선왕릉과 궁궐을 잇는 여행으로, 단순히 유적을 둘러보는 것을 넘어 그 안에 담긴 깊은 역사적 의미와 시대적 배경을 탐색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유산 활용 사업 이면에는, 과거의 유산을 어떻게 해석하고 후대에 전달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자리하고 있다.
이번 ‘왕릉팔경’ 프로그램 중 특히 주목받는 것은 순종황제가 머물렀던 홍릉과 유릉을 중심으로 하는 여정이다. 기자는 2025년 9월 초, ‘순종황제 능행길’이라는 새로운 코스에 참여하며 변덕스러운 늦여름 날씨 속에서도 조선과 대한제국 왕실의 역사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릉이지만, 직접 걸으며 배우는 경험은 이전과는 다른 깊은 매력을 선사했다. 구리 동구릉에서 시작해 남양주 홍릉과 유릉까지 이어지는 이번 여정은 왕릉과 왕릉 사이의 길 위에서 역사의 숨결을 따라가는 특별한 기회였다.
이 프로그램은 능침 답사가 포함되는 특성상 회당 참가 인원을 25명으로 제한하고 있다. 이는 높은 신청 경쟁률로 이어지며, 이미 올해 상반기에는 여섯 코스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고 하반기에도 두 코스가 추가 운영될 예정이다. 이번 여정의 가장 큰 특징은 조선 왕실 중심의 탐방이 아닌 대한제국 황실 관련 유적을 중심으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참가자들은 조선과 대한제국의 왕릉 문화를 직접 비교하며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고, 근대 전환기의 역사와 문화를 몸소 체험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
탐방은 조선 최대 규모의 능역인 구리 동구릉에서 시작되었다. 1408년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을 비롯해 총 아홉 기의 왕릉이 모여 있는 이곳은 조선 전기부터 후기까지 다양한 시대의 무덤을 품고 있다. 해설사는 능역의 구조와 제향의 의미, 그리고 능묘에 담긴 정치적 배경을 상세히 설명했다. 특히, 조선 전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표석이 송시열의 상소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설명은 인상 깊었다. 권위적인 학자였던 송시열은 후손들이 왕릉을 구분하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왕릉마다 해당 임금을 알 수 있는 표석을 세울 것을 주장했다. 그의 제안은 예의 엄격함과 기억 보존의 장치로 기능했으며, 효종의 영릉에 최초로 표석이 설치된 것을 시작으로 왕릉 제도에 자리 잡았다. 표석에 사용된 전서체 또한 송시열의 주장으로, 왕은 일반인과 구분되는 존재로서 장례와 예제 또한 달라야 한다는 그의 생각을 반영한 결과였다.
이어 ‘순종황제 능행길’의 핵심인 대한제국 황실 유적 탐방이 이어졌다. 유릉은 순종황제와 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의 합장릉으로, 침전에서 홍살문까지 문무석상과 다양한 석물들이 배치되어 위엄을 더한다. 순종은 대한제국의 제2대 황제이자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마지막 황제가 된 비극적인 인물이다. 조선 시대 왕릉 제사는 여러 차례 지내졌으나, 1908년 순종이 반포한 「향사리정에 관한 건」 칙령을 통해 제사 횟수가 1년에 두 번으로 축소되었다. 이 칙령은 종묘 정전에 모셔진 왕과 왕비의 능에는 명절제와 기신제를 모두 지냈지만, 정전에 모셔지지 않은 임금과 왕비의 능에서는 명절제 한 번만 지내도록 규정했다. 또한, 명절제의 날짜가 한식에서 청명으로 바뀌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오늘날에는 기신제가 중심으로 남아 혼란이 줄어들었으며, 이러한 제사의 지속성은 조선왕릉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동구릉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은 봉분을 뒤덮은 억새로 유명하다. 태조는 생전에 고향의 억새를 무덤에 심어달라는 유훈을 남겼고, 이에 따라 아들 태종이 함흥에서 억새를 옮겨와 봉분을 덮었다. 이러한 전통은 6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건원릉의 표석에는 ‘대한 태조 고황제 건원릉’이라 적혀 있어 태조의 위상이 황제로 격상되었음을 보여주며, 이는 왕릉 제도와 예제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다. 봉분 주위에는 병풍석, 난간석, 호랑이와 양 석상, 망주석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능 전체는 곡장으로 감싸여 있다. 제향은 봉분 아래 정자각에서 올리며, 봉분 앞의 혼유석은 혼이 머무는 자리로 여겨진다.
추존왕의 능 역시 정통 왕릉과는 차이를 보인다. 생전에 왕이 아니었다가 아들이 왕위에 오르면서 추존된 이들의 무덤은 기본 구조는 같지만, 석물의 배치 등에서 구분된다. 왕릉은 망자의 영역인 봉분이 있는 언덕과 산 자와 죽은 자가 제사를 통해 만나는 제향 공간으로 나뉜다. 이곳에는 임금의 업적을 기록한 신도비와 무덤의 주인을 알리는 표석이 세워졌다. 건원릉의 신도비는 앞면에 ‘역신 정도전’이라 적혀 있으나 뒷면에는 ‘공신 봉화백 정도전’이라 새겨져 당시 정치적 상황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왕의 업적은 『실록』에 남기므로 이후에는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다. 추존왕의 능 중에는 합장릉도 있는데, 익종(효명세자)과 신정왕후의 무덤이 대표적이다. 이 능은 일반적인 왕과 왕비의 좌우 배치와 달리 신정왕후의 지위가 높아 배치가 달라졌으며, 당시의 서열 의식이 왕릉 공간에도 반영된 사례다.
동구릉에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왕릉 중 유일하게 세 기의 봉분이 나란히 배치된 삼연릉이 있다. 이곳은 헌종과 두 왕비(효현왕후·효정왕후)가 합장된 능으로, 봉분이 세 기 나란히 조성된 것이 특징이다. 삼연릉의 비석은 대한제국 시기에 새겨졌으며, 여러 차례 다시 새겨진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이는 석비 제작에 따른 경제적 부담을 최소화하려 했던 당시의 사정을 보여준다. 홍릉의 비각 표석 또한 대한제국과 일본 간의 갈등을 보여주는데, 일본은 비문 서두에 ‘前大韓(전대한)’이라는 표현을 넣자고 주장했으나 대한제국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결국 고영근 참봉이 일본의 눈을 피해 ‘大韓高宗太皇帝洪陵 明成太皇后附左(대한고종태황제홍릉 명성태황후부좌)’라는 비문을 완성했다.
홍릉과 유릉은 기존 조선 왕릉의 형식을 벗어나 대한제국 황릉의 양식을 따른다.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왕조에서 황제국으로 체제를 전환한 것처럼, 능의 조영 방식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석물의 배치, 봉분의 규모, 향어로의 장식은 황제의 권위를 강조했지만, 그 화려함 속에는 주권을 빼앗긴 민족의 아픔이 깃들어 있었다.
홍릉과 유릉을 돌아보며 마주한 화려한 석물과 질서정연한 배치는 분명 위엄을 풍겼지만, 그 속에는 주권을 잃은 황제와 황후의 쓸쓸한 이야기가 함께 잠들어 있었다. 오늘날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왕릉은 그 자체로 아름답지만, 그 뒤에 담긴 역사를 외면하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오늘의 의미를 되새기는 일이다. 역사의 숨결과 함께 호흡한 하루의 여정은 미래 세대가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이어갈 것인가에 대한 깊은 울림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