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급격한 산업화와 환경 변화 속에서 과거 번성했던 산업이 사라지면서 지역 사회가 겪는 정서적, 경제적 어려움은 깊어지고 있다. 울산 장생포 지역의 경우, 과거 주요 생업이었던 포경 산업의 몰락은 지역 경제뿐 아니라 공동체의 정체성과 추억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더 이상 과거와 같은 규모의 포경 산업은 존재하지 않지만, 장생포는 사라진 산업의 흔적과 그 속에 담긴 향수를 현재까지 이어가는 독특한 방식으로 지역의 정체성을 재정의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과거 회상을 넘어, 도시의 기억을 현재로 불러내고 공동체의 미래를 준비하는 복합적인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장생포의 이야기는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고래잡이 그림과 각종 유물들은 이곳이 예로부터 고래가 풍부하게 서식했던 깊은 바다였음을 증명한다. 특히 동해와 남해가 만나는 지리적 이점, 풍부한 먹이 자원, 그리고 큰 배를 대기 용이한 자연환경은 장생포를 고래들의 이상적인 서식지이자 인간의 중요한 어업 기지로 만들었다. 태화강, 삼호강, 회야강 등 하천에서 유입되는 부유물과 플랑크톤은 고래의 먹이가 되는 새우 등 작은 물고기들을 끌어들였고, 이는 자연스럽게 이곳을 찾는 ‘귀신고래’를 비롯한 다양한 고래들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이러한 천혜의 환경 덕분에 장생포는 6.25 전쟁 이후부터 1980년대 상업 포경 금지 이전까지 ‘고래의 땅’으로 불릴 만큼 어업이 크게 성행했던 곳이다. 당시 수출입품을 실어 나르는 대형 선박들이 빼곡했으며, 6~7층 규모의 냉동 창고가 즐비할 정도로 활기찬 산업 도시의 면모를 자랑했다.
하지만 1986년 국제포경위원회(IWC)의 상업 포경 금지 결정 이후, 장생포의 찬란했던 고래 산업은 급격히 쇠퇴했다. 1973년 양고기를 가공하던 남양냉동이 들어섰다가 1993년 명태, 복어, 킹크랩 등을 가공하던 세창냉동으로 바뀌었으나, 경영난으로 문을 닫으면서 냉동 창고는 흉물스럽게 방치되었다. 이러한 폐허가 된 공간을 지역 사회와 지자체가 나서서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시켰다. 2016년 울산 남구청은 건물과 토지를 매입하고 주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여 2021년, 폐냉동창고를 ‘장생포문화창고’로 재탄생시켰다. 과거 산업 시설의 흔적을 그대로 살린 업사이클링을 통해, 이곳은 이제 누구나 무료로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복합 문화 예술 공간으로 변모했다. 총 6층 규모의 건물에는 소극장을 비롯해 녹음실, 연습실이 마련되어 지역 문화 예술인들의 거점 역할을 하며, 특별 전시관, 갤러리, 상설 미디어아트 전시관 등을 갖추고 있어 모든 세대가 즐길 수 있는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특히 2층 체험관의 ‘에어장생’ 항공 체험 프로그램과 같은 어린이와 가족 단위 방문객을 위한 콘텐츠, 정선, 김홍도, 신윤복 등 한국 대표 화가들의 작품을 미디어 아트로 재현한 ‘조선의 결, 빛의 화폭에 담기다’ 전시는 시민들에게 새로운 감성과 경험을 선사한다.
무엇보다 장생포문화창고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2층에 상설 전시된 ‘울산공업센터 기공식 기념관’이다. 이곳은 과거 울산의 중화학공업 발전사를 생생하게 보여주며, 특히 산업화의 이면에 존재했던 환경 문제와 그로 인한 주민들의 고통을 조명한다. 1980년대 조성된 온산국가산업단지에 제련소, 석유화학공장 등이 집중되면서 발생한 중금속 배출은 ‘온산병’이라 불리는 심각한 중금속 중독 질환을 유발했고, 이는 산업 발전의 대가로 치러야 했던 어두운 그림자였다. 전시를 통해 과거의 옳았던 일과 현재에는 틀린 일들을 배우며, 우리는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는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장생포의 ‘고래고기’는 단순한 음식을 넘어선 의미를 지닌다. 상업 포경이 금지된 이후에도, 장생포의 고래요릿집들은 혼획된 고래 등을 합법적으로 유통하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12만 원에 달하는 ‘모둠수육’과 같은 메뉴는 쇠고기와 흡사한 붉은 빛깔의 살코기, 쫄깃한 껍질, 그리고 다양한 부위의 다채로운 맛으로 ‘일두백미(한 마리에서 열두 가지 맛)’라 불리는 고래고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특히 ‘우네(가슴 부위)’와 ‘오배기(피하지방과 근육층이 겹쳐진 부위)’와 같은 고급 부위는 기름진 고소함과 쫄깃한 식감의 조화를 자랑한다. 과거 비린 고래고기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을 가진 이들도 다시 맛보게 만드는, 부위마다 다른 맛과 식감은 과거의 추억을 소환한다. 결국 장생포의 고래요릿집은 단순히 ‘고래를 먹는 장소’가 아니라, 사라진 산업, 사라진 생업, 사라진 포경선의 향수를 고기 한 점에 담아 음미하며 과거를 애도하고 회상하는 의례적 공간이 된다. 고래로 꿈을 꾸었던 어부들, 고래고기로 단백질을 보충했던 사람들과 한강의 기적을 일군 산업 역군들을 기리는 문화적 지층이 이곳에 쌓여 있다. 장생포의 고래는 사라졌지만, 고래고기는 사라지지 않으며, 그 맛과 기억을 통해 우리는 여전히 고래의 시간을 씹고, 도시의 기억을 삼키며, 공동체의 내일을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