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 관광의 중심에 늘 자리하던 제주도의 인기가 예전 같지 않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과거 코로나19 이전에는 국내 최대 관광지로 인파가 끊이지 않았으나, 현재는 일본, 중국, 베트남 등 해외여행 수요 증가로 인해 국내 관광객들의 발길이 줄어든 상황이다. 높은 물가와 같은 몇 가지 이슈가 발목을 잡고 있지만, 여전히 제주도는 국내 여행 1번지로서의 매력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십 년 만에 다시 찾은 ‘용머리해안’은 국내 관광 콘텐츠인 ‘로컬100’에 이름을 올린 제주도의 중요한 유산으로, 그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방문할 시간이 맞지 않아 가보지 못한 제주 사람들도 많을 정도로 숨겨진 보석과도 같다.
용머리해안은 방문객의 수고로움을 요구하는 특별한 장소다. 바닷물이 빠지는 물때를 맞춰야만 출입이 가능하며, 거센 비바람이 불 경우에는 출입이 금지되므로 매일 오전 9시에 문을 여는 관광안내소에 입장 시간을 확인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미끄럽지 않은 편안한 신발을 신고 용머리해안으로 향하는 길은 마치 시간 여행을 떠나는 듯한 설렘을 안겨준다. 용머리해안이 자리 잡은 서귀포시 안덕면에 이르기 전, 저 멀리 시선을 사로잡는 거대한 돌덩이인 ‘산방산’은 제주의 신화와 역사를 동시에 보여주는 듯하다. ‘산방산’에 얽힌 설문대 할망 신화는 한라산 봉우리를 뽑아 던져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실제로는 한라산보다 앞서 생성된 지질학적 현상이다.
용머리해안은 산방산과 함께 제주의 지질학적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으로, 한라산과 산방산, 그리고 제주 본토가 형성되기 훨씬 이전에 만들어진 화산체다. 약 100만 년 전 얕은 바다에서 일어난 화산 폭발은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간헐적으로 여러 분화구에서 계속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화산재가 쌓이고 깎여나가는 과정을 반복하며 지금의 용머리해안을 만들었다. 이곳은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땅이자 태곳적 땅이라 할 수 있다. 용암과 바다, 그리고 시간이 만들어낸 압도적인 풍경은 사진이나 영상으로는 온전히 담아낼 수 없으며, 직접 보아야만 그 장엄함을 느낄 수 있다. 검은 현무암과 옥색 바다가 기묘하게 얽히는 풍경 속에서 100만 년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작은 방처럼 움푹 들어간 굴방, 드넓은 암벽의 침식 지대, 그리고 오랜 세월 쌓여 만들어진 사암층과 파도가 빚어낸 해안 절벽은 방문객에게 경이로움을 선사한다.
바위가 용의 머리처럼 생겨 ‘용머리’라는 이름이 붙은 이 땅은 예로부터 영험한 기운을 지닌 곳으로 여겨졌다. 진시황이 이곳의 혈맥을 끊기 위해 보낸 사자가 용의 허리와 꼬리를 끊었다는 전설은 산방산과 용머리해안에 얽힌 신비로움을 더한다. 용의 피가 솟구쳐 만들어졌다는 기암절벽, 층층이 쌓인 지층, 그리고 뻥뻥 뚫린 구멍들은 제주 최초의 속살을 만나는 듯한 환희를 느끼게 한다. 파도가 철썩이는 곳에서는 거북손과 다양한 어패류들이 단단히 자리 잡고 있으며, 제주 할망과 아낙들이 좌판을 펴고 관광객들을 맞이한다. 이 거대한 자연 앞에서 인간의 짧은 삶은 겸손해진다.
용머리해안에서의 여정은 약 한 시간 정도 소요되며, 이 땅과 가장 잘 어울리는 음식은 바로 고사리해장국이다. 화산섬이라는 지리적 특성상 물과 곡식이 부족했던 제주에서 오랜 시간 제주 사람들의 생계를 책임졌던 두 가지 작물은 고사리와 메밀이었다. 척박한 화산암에서도 뿌리를 단단히 내리고 빗물을 저장하는 다년생 양치식물인 고사리는 제주 생태계의 시작이자 식재료의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성이 있지만,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고사리를 삶고 말려 독성과 쓰린 맛을 제거한 뒤 즐겼으며, 먹을 것이 부족했던 제주에서 고사리는 더욱 귀한 식재료였다.
제주 사람들에게 고사리해장국은 ‘소울푸드’라 할 수 있다. 논농사가 어려웠던 제주에서는 소보다 돼지를 주로 키웠으며, 잔치에는 항상 돼지가 잡혔다. 돔베고기를 만들고 남은 돼지 뼈로 곤 육수는 다양한 국물 요리의 기반이 되었다. 돼지 뼈 육수에 돼지 살코기와 고사리를 넣고 푹 끓이면 걸쭉하면서도 감칠맛 나는 고사리해장국이 완성된다. 육개장의 고사리가 소고기를 대신하는 것처럼, 고사리는 쫄깃한 식감과 풍부한 맛을 더하며, 여기에 메밀가루를 더하면 더욱 걸쭉하고 은은한 감칠맛을 자랑하는 고사리해장국이 된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사리해장국은 메밀가루 때문에 약간 갈색 빛이 도는 검붉은 색이지만,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으면 구수한 맛이 일품이다. 메밀 전분이 풀어져 걸쭉해진 국물은 전혀 자극적이지 않으며, 제주 사투리로 ‘베지근하다’고 표현되는, 기름진 맛이 깊으면서도 담백한 맛을 선사한다. ‘베지근하다’는 말은 고기 따위를 푹 끓인 국물이 구미를 당길 정도로 맛있다는 의미로, 속을 든든하게 채워준다는 뜻도 담고 있다. “국물맛이 베지근하우다!”라는 표현은 맛을 제대로 칭찬하는 최상급 표현이다. 밥 한 공기를 말아 넣으면 고사리해장국의 농밀한 국물은 더욱 걸쭉해져 흡사 죽처럼 되직해지지만, 입에 걸리는 것 없이 부드럽게 넘어간다. 가난과 통한의 연속이었던 제주 사람들의 삶 속에서 탄생한 이 담백하고 유순한 맛은 그들의 인내와 지혜를 보여준다. 창밖으로 보이는 유채꽃과 산방산, 그리고 그 아래 엎드린 용머리해안을 바라보며 고사리해장국 한 그릇은 100만 년 제주의 역사를 관통하는 깊은 맛을 선사한다. 제주를 찾은 모두가 “폭싹 속았수다”라고 말할 만큼, 잊지 못할 경험을 선사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