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릉과 궁궐을 잇는 여행 프로그램 「2025년 하반기 왕릉팔경」 운영 소식이 전해졌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이 단순히 아름다운 유적을 둘러보는 것을 넘어, 우리가 잊고 있었던 혹은 제대로 알지 못했던 역사적 맥락과 제도의 변화를 생생하게 체험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특히, 단순한 왕릉 탐방을 넘어 대한제국 황실 관련 유적까지 아우르는 이번 여정은, 조선과 대한제국을 관통하는 역사적 흐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문화유산으로서 조선왕릉의 가치는 이미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념비적인 유적을 직접 걸으며 배우고 느끼는 여행은 또 다른 차원의 매력을 선사한다. 「2025년 하반기 왕릉팔경」 프로그램의 새로운 여정 중 하나인 ‘순종황제 능행길’은 이러한 프로그램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 프로그램은 구리 동구릉에서 시작하여 남양주 홍릉과 유릉까지 이어지며, 왕릉과 왕릉을 잇는 길 위에서 역사의 숨결을 따라가는 특별한 체험으로 마련되었다. 능침 답사가 포함되어 있어 참가 인원은 회당 25명으로 제한되지만, 이미 높은 신청 경쟁률을 보이고 있다. 이는 국민들이 단순한 관광을 넘어 역사적 깊이를 탐구하려는 욕구가 크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번 여정은 조선 왕실 중심의 탐방에서 벗어나 대한제국 황실 관련 유적을 중심으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특히 의미가 깊다. 이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왕릉 문화를 직접 비교하며 역사적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근대 전환기의 역사와 문화를 몸소 체험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 될 것이다.
동구릉은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을 비롯하여 선조, 인조, 문종, 경종, 영조, 추존왕 문조, 현종, 헌종 등 아홉 기의 왕릉이 모여 있는 조선 최대 규모의 능역이다. 이곳에서 해설사는 능역의 구조와 제향의 의미, 그리고 능묘에 담긴 정치적 배경을 차근차근 풀어냈다. 특히, 표석의 기원에 대한 설명은 인상 깊었다. 조선 전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이 돌 표지석이 송시열의 상소로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이는 왕릉 제도의 변화와 함께 예법의 엄격함, 그리고 기억을 보존하는 장치로서 기능하게 되었다. 표석에 사용된 전서체 또한 송시열의 주장으로, 제왕은 일반인과 구분되는 존재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순종황제의 능행길은 대한제국의 비극적인 역사를 되짚어보는 중요한 여정이다. 순종은 대한제국의 제2대 황제이자 조선의 마지막 황제였다. 조선 시대 왕릉 제사는 사계절과 납일에 지내는 오향대제와 명절날 지내는 제사, 그리고 기신제로 이어졌다. 그러나 순종 황제 때인 1908년, 「향사리정에 관한 건」이라는 칙령을 통해 제사 횟수가 1년에 두 번으로 축소되었다. 이 칙령은 종묘 정전에 모셔진 왕과 왕비의 능에는 명절제와 기신제를 모두 지냈지만, 정전에 모셔지지 않은 임금과 왕비의 능에서는 명절제 한 번만 지내도록 규정했다. 명절제의 날짜 역시 혼선이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기신제가 중심으로 남아 혼란이 줄어들었다. 이러한 제사 전통의 단절 없는 계승은 조선 왕릉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는 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건원릉 봉분의 억새는 태조 이성계의 유언에서 비롯된 독특한 전통이다. 태조는 생전에 고향의 억새를 무덤에 심어달라는 유훈을 남겼고, 그의 아들 태종이 이를 이행했다. 6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전통은 이어지고 있다. 건원릉의 표석에는 ‘대한 태조 고황제 건원릉’이라 적혀 태조의 위상을 황제로 격상해 전하며, 이는 왕릉 제도와 예제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다.
왕릉의 핵심 의례 공간인 정자각은 제물을 차리고 제사를 지내는 중심 건물로, 계단은 제물·제관·왕이 오르는 길이 구분되며, 왕이 직접 참석할 경우 신하들은 별도의 목계를 사용했다. 정자각 앞에는 혼이 다니는 신로와 제관·왕이 이용하는 어로가 분리되어 산 자와 죽은 자의 구분을 상징한다.
추존왕의 능은 생전에 왕이 아니었으나 뒤에 아들이 왕위에 오르면서 추존된 경우로, 정통 왕릉과는 차이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에는 호랑이와 양이 네 쌍씩 세워져 있지만, 추존왕의 능에는 절반만 배치하여 구분했다. 왕릉은 망자의 영역인 봉분이 있는 언덕과 산 자와 죽은 자가 제사를 통해 만나는 제향 공간으로 나뉘며, 이곳에는 임금의 업적을 기록한 신도비와 무덤의 주인을 알리는 표석이 세워졌다.
경릉은 헌종과 두 왕비가 합장된 삼연릉으로, 조선과 대한제국의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세 기의 봉분이 나란히 배치된 사례다. 왕과 왕비의 위계는 생전과 사후에 달라지며, 삼연릉은 이러한 위계 원칙에 따라 서열대로 배치되어 있다. 삼연릉 앞에 서 있는 비석은 대한제국 시기에 새겨진 것으로, 여러 차례 다시 새겨진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이는 석비 제작에 따른 경제적 부담을 최소화하려 했던 당시의 사정을 보여준다.
홍릉과 유릉은 기존 조선 왕릉의 형식을 벗어나 대한제국 황릉의 양식을 따랐다.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왕조에서 황제국으로 체제를 전환한 것처럼, 능의 조영 방식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석물의 배치, 봉분의 규모, 향어로의 장식은 모두 황제의 권위를 강조했지만, 그 화려함 속에는 주권을 빼앗긴 민족의 아픔이 깃들어 있었다. 홍릉 석물은 화강암 파손을 막기 위한 전통 기법이 반영되었으며, 유릉보다 작고 동물 다리가 막힌 형태로 제작되었다.
홍릉의 비각 표석은 대한제국과 일본 간의 갈등을 보여주는 역사적 맥락을 담고 있다. 일본이 비문 서두에 ‘前大韓’이라는 표현을 넣자고 주장했으나, 대한제국은 ‘前’ 자를 용납할 수 없다며 강하게 반대했다. 이 논쟁으로 표석은 수년간 방치되었으나, 홍릉 참봉 고영근이 일본의 눈을 피해 ‘大韓高宗太皇帝洪陵 明成太皇后附左’라는 비문을 완성해 놓았다. 흥미로운 역사적 아이러니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일본에 동조하다 망명한 우범선의 아들 우장춘 박사가 귀국 후 한국 농업계에 큰 업적을 남겼다는 점이다.
홍릉과 유릉을 돌아보며 마주한 화려한 석물과 질서정연한 배치는 분명 위엄을 풍겼지만, 그 속에는 주권을 잃은 황제와 황후의 쓸쓸한 이야기가 함께 잠들어 있었다. 초등학생 참가자가 “역사학자가 되어 문화유산을 지키고 싶다”는 포부를 밝힌 모습은, 이 길이 단순히 과거를 되짚는 시간이 아니라 미래 세대가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이어갈 것인가를 묻는 자리임을 상기시켰다. 오늘날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왕릉은 그 자체로 아름답지만, 그 뒤에 담긴 역사를 외면하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오늘의 의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