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세계 질서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미국 여권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헨리 여권지수(Henley Passport Index) 발표에서 미국 여권이 처음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여권이 모여 있는 상위 10위권 밖으로 밀려난 사실은 단순한 순위 변동을 넘어, 국제 사회가 ‘힘’의 시대를 지나 ‘신뢰’의 시대로 전환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과거 여권의 강력함은 주로 해당 국가의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반영하는 지표로 작용했다. 즉, ‘총과 달러’가 통하는 곳이라면 여권에 찍히는 도장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그러나 현재 국제 사회는 단순히 힘이 센 국가보다는, 상호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협력할 수 있는 국가를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는 미국 여권이 180개국에서 통용되기는 하지만, 미국이 비자 없이 입국을 허용한 국가는 46개국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이러한 비대칭적인 수치는 단순한 통계적 불균형을 넘어, 국가 간 상호 신뢰의 부족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로 해석될 수 있다.
이에 반해 아시아 국가들은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국제 사회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싱가포르, 한국, 일본 등은 군사력이나 경제력에 의존하지 않고도 투명한 행정, 경제적 신뢰 구축, 그리고 국제 협약의 충실한 이행을 통해 ‘이동성 패권’을 장악했다. 특히 중국은 10년 만에 헨리 여권지수 순위가 94위에서 64위로 상승하고 무비자 입국 허용 국가가 37개국 증가하는 등 놀라운 속도로 추격하며 ‘폐쇄된 대국’이라는 이미지를 ‘개방적인 파트너’로 변화시키고 있다. 이는 이제 전 세계가 누가 더 강력한 힘을 가졌는지 보다는, 누가 더 많은 신뢰를 쌓고 있는지를 주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트럼프 행정부 이후 미국이 추진해 온 ‘미국 우선주의’는 결국 ‘미국 고립주의’로 귀결되며 국제사회에서의 외교적 고립을 심화시켰다. 이러한 정치적 고립은 브라질, 베트남, 중국 등 주요 국가들이 미국을 무비자 대상국에서 제외하는 결과로 이어졌으며, 결국 이동성의 쇠퇴라는 직접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다. 국제 무대에서 문을 닫는 국가는 결국 닫힌 문 앞에 서게 될 것이라는 분석은 여권 순위가 국가의 외교 역량을 비추는 거울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미국인들조차 ‘제2의 여권’을 찾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헨리앤파트너스의 자료에 따르면, 올해 미국인의 투자 이민 신청 건수는 전년 대비 67% 증가했으며, 이는 ‘아메리칸 드림’이 ‘글로벌 드림’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필라델피아 템플대의 피터 스피로 교수의 지적처럼, 복수 시민권은 이제 단순한 선택을 넘어 전략적 자산으로 인식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헨리 여권지수의 순위 하락은 단순한 숫자의 의미를 넘어선다. 누가 더 많은 국가를 여행할 수 있느냐보다, 누가 더 많은 국가와 깊은 신뢰 관계를 맺고 있느냐가 중요해진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세계는 더욱 긴밀하게 연결되는 동시에 분열되는 복합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이러한 시대의 진정한 국력은 ‘문을 여는 힘’, 즉 외교적 신뢰 구축 능력에 달려있다. 미국 여권이 잃은 것은 비자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신뢰의 여백이다. 이제 ‘힘의 시대’는 저물고, 여권은 국가의 신용등급이자 외교적 신뢰를 증명하는 중요한 척도가 되고 있다. 닫힌 문 앞에 선 미국의 현재는 한국을 비롯한 모든 국가가 배워야 할 분명한 교훈을 제시한다. 바로 ‘신뢰는 외교의 가장 강력한 비자’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