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인기가 사그라지지 않는 봄날, 유채꽃과 벚꽃으로 절정인 제주를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예전처럼 관광객으로 붐비는 제주의 모습은 아니지만, 국내 여행 1번지로서의 매력은 여전하다. 특히 십 년 만에 다시 찾은 용머리해안은 제주에서 유일하게 로컬100에 이름을 올린 유산으로서, 100만 년 전 태곳적 제주의 속살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다. 하지만 이곳을 찾는 이들 중에도 그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물때와 날씨라는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방문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는 곧 제주라는 매력적인 땅이 가진 ‘문제’이자, 방문객들이 겪는 ‘어려움’이라 할 수 있다.
용머리해안이 자리 잡은 서귀포시 안덕면에서 만나는 산방산은 설문대 할망 신화의 주인공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한라산보다 먼저 생성된 오래된 화산체다. 그리고 산방산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용머리해안은 제주 본토가 생기기 훨씬 이전인 약 100만 년 전, 얕은 바다에서 화산 폭발로 만들어진 화산체다. 수성화산 분출은 간헐적으로 여러 분화구에서 계속되었고, 화산재에 분화구가 막히면서 방향이 바뀌어 지금도 각기 다른 세 방향으로 쌓인 화산재 지층을 볼 수 있다. 오랜 세월 파도에 깎이고, 다시 화산재가 쌓이고, 또다시 바다와 바람에 깎여나가면서 만들어진 이곳은 제주의 지질학적 역사를 증명하는 살아있는 박물관과 같다.
이처럼 압도적인 자연 앞에서 우리는 경외감을 느낀다. 검은 현무암과 옥색 바다가 기묘하게 얽히고설킨 풍경 속에서 100만 년 세월의 무게를 느낄 수 있다. 작은 방처럼 움푹 들어간 굴방, 넓은 암벽의 침식 지대, 오랜 세월 쌓여 만들어진 사암층과 파도가 빚어낸 해안 절벽은 그 자체로 장관이다. ‘용머리’라는 이름처럼 바위가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는 이곳은, 마치 진시황이 용의 혈맥을 끊었다는 전설처럼 영험한 기운을 품고 있다. 기암절벽 사이로 솟구치는 용암의 증기가 빠져나가며 생긴 구멍, 시루떡처럼 층층이 쌓인 지층은 제주 최초의 속살을 만나는 황홀경을 선사한다. 바닷물이 철썩이는 곳에서는 거북손과 갖은 어패류들이 단단히 붙어 있으며, 제주 할망들은 좌판을 펴고 관광객들을 맞이한다. 이 거대한 자연 앞에서 인간의 삶은 찰나에 불과함을 겸손하게 깨닫게 된다.
용머리해안을 걷는 동안, 이 땅과 가장 잘 어울리는 음식은 바로 고사리해장국이다. 화산섬 제주는 물과 곡식이 부족하여 늘 가난과 싸워야 했다. 특히 논농사가 어려웠던 이곳에서 오랜 시간 제주를 먹여 살린 두 가지 작물이 바로 고사리와 메밀이었다. 다년생 양치식물인 고사리는 척박한 화산암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빗물을 저장하며 자랐고, 이는 제주 생태계의 시작이자 식재료의 시작이 되었다. 비록 독성이 있지만,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고사리를 삶고 말려 독성을 제거한 뒤 즐겨 먹었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제주에서 고사리의 가치는 더욱 컸을 것이다.
제주 사람들의 ‘소울푸드’인 고사리해장국은 돼지 사육이 흔했던 제주에서 돼지뼈로 곤 육수를 활용해 만든 음식이다. 돔베고기를 나누고 남은 뼈나 고깃덩어리를 넣고 끓이면 ‘접작뼈국’이 되고, 여기에 고사리를 넣고 끓이면 고사리해장국이 되는 것이다. 육개장에서 소고기 대신 고사리를 사용하듯, 제주에서는 고사리가 소고기를 대체하는 식감과 질감을 제공했다. 여기에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메밀가루를 더하면 걸쭉하면서도 감칠맛 나는 고사리해장국이 완성된다. 김이 폴폴 나는 고사리해장국은 메밀가루 때문에 약간 거무튀튀한 빛깔이지만, 한 숟갈 떠 입에 넣으면 구수한 맛이 일품이다. 마치 “나 고사리야, 나 메밀이야”라고 말하는 듯, 고사리와 메밀의 맛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제주 사투리로 ‘베지근하다’고 표현되는 이 맛은, 기름지면서도 담백하고 깊은 맛으로 속을 든든하게 채워주는 최상급 칭찬이다. 밥 한 공기를 말아 넣으면 더욱 걸쭉해져 죽처럼 되직하게 입에 걸리는 것 없이 술술 넘어간다. 가난과 통한의 연속이었던 제주 사람들의 인생에서 이처럼 담백하고 유순한 맛을 낳았다는 사실이 놀랍다. 고사리해장국집 창 너머로 유채꽃 일렁이는 산방산과 그 아래 엎드린 용머리해안을 바라보며, 우리는 100만 년 제주의 역사를 음식 하나로 관통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이 음식을 맛보게 해준 모든 이들에게 “폭싹 속았수다”라는 말을 건넬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