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는 흔히 역사의 섬, 호국의 섬으로 불린다. 제주도, 거제도, 진도에 이어 네 번째로 큰 섬인 강화도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선사시대 고인돌부터 대몽항쟁의 거점, 서구 열강의 침략을 막아온 마지막 관문까지, 섬 전체에 유구한 역사가 깃들어 있다. 하지만 강화는 이 모든 역사의 무게를 뒤로하고 계절마다 미식가들을 사로잡는 땅이기도 하다. 봄에는 숭어회, 여름에는 병어회, 가을에는 대하와 갯벌장어 등 풍부한 해산물이 넘쳐난다. 순무와 고구마 같은 특산물도 있지만, 강화는 갯것만으로도 사계절 내내 만족스러운 미식 경험을 선사한다.
이러한 강화도의 정체성은 ‘마니산’과도 깊이 연결된다. 해발 472.1m의 마니산 정상에는 단군왕검이 천제를 올렸다는 참성단이 자리하고 있으며, 현재도 개천절 제례와 전국체전 성화 채화 장소로 민족의 영산으로 여겨진다. 마니산 등반은 어렵지 않으면서도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경험을 제공한다.
그런데 마니산이 아닌 ‘강화소창체험관’과 ‘동광직물 생활문화센터’가 로컬100에 이름을 올린 것에 의아함을 느낄 수 있다. 과거 국내 자본 최초의 방직공장이었던 ‘조양방직’이 거대한 카페로 변신한 명소를 이미 경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방문은 단순한 흥미를 넘어 깊은 감동과 쾌감을 선사했다. 1933년 강화 최초의 인견 공장 ‘조양방직’ 설립 이후 1970년대까지 강화에는 60곳이 넘는 방직공장이 성행했다. 놀랍게도 현재까지도 6개의 소창 공장이 옛 방식 그대로 소창을 직조하고 있다.
폐 소창 공장 ‘동광직물’을 생활문화센터로 개관하고, 1938년에 건축된 한옥과 염색 공장이었던 ‘평화직물’ 터를 리모델링해 ‘소창체험관’으로 운영하는 것은 강화직물의 역사와 문화를 보존하려는 노력의 결과다. 소창은 목화솜 실로 짠 천으로 옷, 행주, 기저귀 감으로 많이 쓰였으며, 일제강점기부터 면화는 인도네시아나 파키스탄에서 수입했다.
문화해설사는 강화가 수원과 더불어 3대 직물 도시였으며, 강화읍 권에만 60여 개 공장이 성행했고 4,000명에 달하는 직공들이 근무했다고 설명한다. 당시에는 12시간 주야간 교대로 먼지 속에서 일했지만, 큰 방직공장에서의 근무는 어린 시절에도 꿈으로 여겨질 만큼 좋은 일자리였다. 서울의 배후도시로서의 지리적 이점과 더불어, 강화는 예부터 화문석으로도 유명했다. 꽃무늬를 놓은 자리 꽃돗자리인 화문석, 특히 강화 왕골로 만든 것은 기품 있고 아름다우며 튼튼하고 보온·통기성이 뛰어나 왕실과 벼슬아치의 초상화에도 등장할 정도로 고려 시대부터 극상품으로 명성을 떨쳤다.
최고의 화문석을 짜던 강화 사람들의 손길이 방직으로 이어진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을지도 모른다. 수입된 원사를 풀어 누렇게 뜬 목화 실을 표백하고 옥수수 전분으로 풀을 먹여 건조하는 과정을 거쳐, 뽀얗고 부드러워진 실로 베틀에서 씨실과 날실을 교차시켜 평직물을 만드는 모든 과정을 이곳에서 볼 수 있다.
이러한 방직의 흔적은 필자에게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성격 깔끔했던 어머니는 삼남매의 기저귀를 소창으로 만들어 부뚜막에서 늘 삶으셨던 기억이 있다. 필자의 기억 속 소창은 행주일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지금도 소창 행주를 삶아 쓰시기 때문이다. 발진, 땀띠, 아토피에도 효과가 있는 소창은 현재에도 꾸준히 수요가 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완성된 방직물을 강화 여인들이 직접 둘러메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판매했다는 점이다. 중간상인 없이 직접 판매하여 마진을 높였고, 북한 개풍까지 왕래했다. 강화도 여인들이 억척스럽고 뻔뻔하다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이 천 쪼가리들을 둘러메고 앞치마에는 강화 새우젓을 싸 갔다는 이야기는 놀랍다. 집집마다 다니며 배고픔을 견디고, 아무 부엌에서나 밥 한 덩이를 얻어 찬으로 삼았던 것은 바로 이 강화 새우젓이었을 것이다.
전국 물량의 70~80%를 차지하는 강화 새우젓은 서해안 전 지역에서 잡히는 젓새우 중에서도 강화의 드넓은 갯벌과 한강, 임진강이 합쳐져 흘러드는 바다 환경 덕분에 맛이 월등하다. 짠맛보다는 들큼하면서도 담백한 맛으로, 늦가을 김장철이면 강화 새우젓을 사려는 인파로 섬이 들썩일 정도다.
이 강화 새우젓이 낳은 소박한 향토 음식이 바로 ‘젓국갈비’다. 이름에는 갈비가 붙었지만, 이 음식의 주인공은 돼지고기 갈비나 호박, 두부, 배추가 아닌 ‘젓국’이다. 새우젓이 모든 재료를 압도하며, 고기 기름의 풍미에 슴슴하면서도 배추에서 우러난 단맛, 젓새우의 감칠맛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특히 살짝 숨죽은 배추는 일품이며, 육수에 채소를 데치는 샤부샤부 이전의 강화 사람들은 젓국 하나로 이처럼 멋진 작품을 창조해냈다.
두부, 호박 등 어떤 재료도 제 잘났다고 나서지 않고 맛이 둥글둥글하게 어우러져 먹고 나면 속이 편안하고 부드러워진다. 외포리가 새우젓으로 유명하지만, 창후리의 강화 앞바다는 최고의 새우잡이 터로 꼽힌다. 강화에서 최고라면 전국 최고라 할 수 있다. 지금도 강화에는 몇 개의 젓국갈비 가게가 성행 중이며, 인공 감미료로 흉내 낼 수 없는 새우젓의 미묘한 감칠맛이 뛰어난 집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미필담(大味必淡)’, 정말 맛있는 음식은 반드시 담백하다는 말처럼, 애호박의 단맛과 배춧잎의 구수한 맛을 끌어올리는 미묘한 새우젓이야말로 젓국갈비 맛의 한 끗을 좌우한다. 오늘 소창의 역사를 알게 되니 이 새우젓이 더욱 다르게 보인다. 방직을 팔기 위해 억척스럽게 전국을 누빈 강화 여인들의 쉰밥, 찬밥에 요긴했을 새우젓을 생각하면 울컥해진다. 또한 어린 동생과 자신을 위해 소창 기저귀를 삶아 키우신 어머니, 그리고 강화도에 사는 함민복 시인의 시구를 떠올리게 된다. 눈물은 왜 짠가, 새우젓은 왜 이다지 짠가, 우리네 인생은 왜 이렇게 애잔한가.
로컬100 칼럼 작성을 위해 방문했던 소창체험관과 동광직물 생활문화센터 직원들과 문화해설사들의 친절함에 다시 한번 감사함을 느낀다. 세상은 이렇게 감사할 일이 도처에 널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