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폭싹 속았수다’가 국민적인 사랑을 받으며 제주의 매력이 다시금 조명받고 있다. 하지만 관광객으로 붐비던 과거와 달리, 해외여행 수요 증가로 제주를 찾는 발길은 예전 같지 않은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주가 여전히 국내 여행 1번지로서의 명성을 유지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특히 100만 년의 시간을 품은 ‘용머리해안’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용머리해안은 제주를 대표하는 자연유산으로, ‘로컬100’에도 이름을 올릴 만큼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아직 많은 제주 사람조차 이 귀한 유산의 진가를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방문 기회를 놓치고 있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용머리해안 방문의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물때’다. 바닷물이 빠지는 특정 시간대에만 입장이 가능하며, 악천후 시에는 출입이 금지될 수 있어 매일 오전 9시부터 운영되는 관광안내소에 입장 시간을 확인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미끄럽지 않은 편안한 신발을 착용하고 용머리해안으로 향하면, 서귀포시 안덕면에 이르기 전부터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산방산’을 마주하게 된다.
산방산은 설문대 할망 신화와 엮여 전해 내려오기도 하지만, 지질학적으로는 한라산보다 먼저 생성된 오래된 화산체다. 그리고 산방산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용머리해안은 한라산과 산방산, 나아가 제주 본토가 형성되기 훨씬 이전인 약 100만 년 전, 얕은 바다에서 발생한 화산 폭발로 만들어진 태곳적 땅이다. 수성화산 분출이 간헐적으로 여러 차례 일어나면서 화산재가 쌓이고, 분화구가 이동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세 방향으로 층층이 쌓인 화산재 지층은 용머리해안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풍경이다. 오랜 세월 파도와 바람에 깎여나가고 다시 쌓이기를 반복한 용머리해안은 제주의 가장 오래된 속살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지질 박물관인 셈이다.
사진이나 영상으로는 결코 담아낼 수 없는 용머리해안의 진정한 매력은 직접 눈으로 보았을 때 비로소 실감할 수 있다. 용암과 바다, 그리고 수많은 시간이 빚어낸 풍경은 인간의 존재를 잠시 잊게 할 만큼 장엄하다. 검은 현무암과 옥색 바다가 기묘하게 어우러진 풍경 속에서는 100만 년이라는 세월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작은 동굴부터 넓게 펼쳐진 침식 지대, 오랜 시간 쌓여 만들어진 사암층과 파도가 빚은 해안 절벽까지, 용머리해안은 다채로운 지질학적 경관을 선사한다. 바위의 모습이 마치 용의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용머리’라는 이름처럼, 이 땅은 신비로운 전설까지 품고 있다. 진시황이 영기를 끊기 위해 보낸 사자가 산방산의 혈맥을 끊었다는 이야기는 용머리해안에서 산방산을 바라볼 때 더욱 오묘한 감흥을 자아낸다. 솟구치는 용암의 증기가 빠져나가 구멍이 뚫린 자국, 시루떡처럼 겹겹이 쌓인 지층은 제주의 오랜 역사를 생생하게 증언한다.
이러한 거대한 자연 앞에서 인간의 삶은 겸손해진다. 거북손과 어패류들이 바위에 단단히 붙어있는 모습, 해녀들이 좌판을 펴고 관광객을 맞이하는 풍경은 제주의 삶과 자연이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용머리해안을 둘러보며 걷는 한 시간 동안, 이 땅과 가장 잘 어울리는 음식으로는 단연 ‘고사리해장국’을 꼽을 수 있다.
제주는 척박한 땅으로 인해 물과 곡식 농사가 어려웠던 지역이다. 논농사가 불가능했던 제주의 삶을 지탱해 준 두 가지 주요 작물은 바로 고사리와 메밀이었다. 다년생 식물인 고사리는 척박한 화산암에서도 뿌리를 깊게 내려 빗물을 저장하는 강인한 생명력을 지녔다. 곶자왈에서 자생하는 다양한 종류의 고사리는 제주 생태계의 시작이자 중요한 식재료였다. 독성이 있지만, 삶고 말리는 과정을 거쳐 독성과 쓴맛을 제거한 고사리는 제주 사람들에게 귀한 식량이었으며, 제사와 명절 상에도 올랐다.
고사리해장국은 제주 사람들의 ‘소울푸드’로 자리 잡았다. 육지에서는 소고기로 육개장을 끓이지만, 제주에서는 돼지 사육이 일반적이었고, 돼지를 잡고 남은 뼈로 육수를 내 다양한 국을 끓였다. 돼지 뼈로 곤 육수에 돼지고기를 넣으면 ‘접작뼈국’, 모자반을 넣으면 ‘몸국’, 그리고 고사리를 넣으면 ‘고사리해장국’이 완성된다. 소고기를 대신할 식감을 지닌 고사리와,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메밀가루가 만나 걸쭉하면서도 감칠맛 나는 고사리해장국이 탄생하는 것이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사리해장국은 메밀가루 때문에 짙은 갈색 빛을 띠지만, 한 숟갈 떠 입에 넣으면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메밀 전분으로 걸쭉해진 국물은 전혀 자극적이지 않으며, 고사리와 메밀의 맛이 은은하게 조화를 이룬다. 제주 사투리로 ‘베지근하다’고 표현되는 이 맛은 기름지면서도 담백한, 속을 든든하게 채우는 깊은 맛을 의미한다. 밥 한 공기를 말아 먹으면 더욱 되직해져 죽처럼 부드럽게 넘어가는 고사리해장국은, 가난과 역경 속에서도 담백하고 유순한 맛을 빚어낸 제주 사람들의 지혜와 삶을 담고 있다.
고사리해장국집 창밖으로 보이는 유채꽃 핀 산방산과 그 아래 엎드린 용머리해안을 바라보며, 100만 년의 시간을 관통하는 듯한 깊은 감회를 느낀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이 귀한 음식을 맛보게 해준 식당 주인장, 타향살이를 견디며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여동생까지, 모든 존재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든다. 마치 “폭싹 속았수다”라는 제주 방언처럼, 우리는 모두 수고했다는 위로를 건네며, 제주의 척박함이 빚어낸 따뜻하고 깊은 맛의 여정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