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의 가치를 알리고자 기획된 ‘왕릉팔경’ 프로그램이 2025년 하반기 운영을 앞두고 있다. 그러나 최근 ‘순종황제 능행길’ 탐방에서 드러난 왕릉의 역사적 변천사는 단순한 유적 탐방을 넘어, 대한제국이라는 시대의 아픔과 마주하게 한다. 조선왕릉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지만, 시대의 변화에 따라 왕릉의 형식과 예법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살펴보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이번 탐방은 대한제국 황실 관련 유적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조선과 대한제국의 왕릉 문화를 비교하며 역사적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구리 동구릉은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을 시작으로 9기의 능침이 모여 있는 조선 최대 규모의 능역이다. 이곳은 조선 전기부터 후기까지 다양한 시대의 무덤이 자리하며, 능역의 구조와 제향의 의미, 그리고 능묘에 담긴 정치적 배경을 통해 역사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특히 표석(表石)의 기원은 우암 송시열의 상소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세월이 흐른 뒤 후손들이 왕의 무덤을 구분하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표석 설치를 주장했으며, 이는 왕릉 제도 속에 점차 확산되었다. 표석의 서체가 전서체(篆書體)로 정착된 것 역시 송시열의 주장으로, 제왕의 위엄을 일반인과 구분하기 위한 예법의 엄격함을 보여준다.
‘순종황제 능행길’은 대한제국의 제2대 황제이자 조선의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의 삶과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로가 된다. 조선 시대 왕릉 제사는 여러 차례 지내졌으나, 1908년 순종은 「향사리정에 관한 건」이라는 칙령을 반포하여 제사 횟수를 연 2회로 축소했다. 이는 종묘 정전에 모셔진 왕과 왕비의 능에는 명절제와 기신제를 모두 지냈지만, 그렇지 않은 능에서는 명절제 한 번만 지내도록 규정했다. 명절제의 날짜 또한 한식에서 청명으로 바뀌었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등, 예제 제도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제사의 단절 없는 계승은 조선 왕릉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동구릉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건원릉은 태조 이성계의 유언에 따라 봉분을 억새로 덮은 것이 특징이다. 이는 태조의 고향에 대한 애정과 후손들의 계승 의지를 보여주는 독특한 전통이다. 건원릉의 표석에 ‘대한 태조 고황제 건원릉’이라 적힌 것은 태조의 위상을 황제로 격상해 전하며, 왕릉 제도와 예제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가 된다. 봉분 주위의 병풍석, 난간석, 호랑이와 양 석상, 망주석 등은 왕릉으로서의 위엄을 나타내며, 정자각에서의 제향 공간은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신성한 곳으로 인식되었다.
추존왕의 능은 생전에 왕이 아니었으나 후에 아들이 왕위에 오르면서 추존된 경우로, 정통 왕릉과 구분되는 특징을 지닌다. 예를 들어, 건원릉에는 호랑이와 양 석상이 네 쌍씩 세워져 있지만, 추존왕의 능에는 절반만 배치하여 구분했다. 또한, 신도비와 표석은 임금의 업적을 기록하고 무덤의 주인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건원릉의 신도비에 새겨진 ‘역신 정도전’과 ‘공신 봉화백 정도전’이라는 상반된 기록은 당시 정치적 상황을 엿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경릉은 헌종과 두 왕비(효현왕후·효정왕후)가 합장된 삼연릉으로, 세 기의 봉분이 나란히 배치된 유일한 사례이다. 왕과 왕비의 위계는 생전과 사후에 달라지며, 이러한 서열 원칙은 능의 배치와 비석 표기에서도 확인된다. 삼연릉 앞에 서 있는 대한제국 시기의 비석은 여러 차례 다시 새겨진 흔적을 간직하고 있으며, 이는 석비 제작에 따른 경제적 부담을 최소화하려 했던 당시의 사정을 보여준다.
홍릉과 유릉은 기존 조선 왕릉의 형식을 벗어나 대한제국 황릉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이후 체제가 전환되면서, 능의 조영 방식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석물의 배치, 봉분의 규모, 향어로의 장식 등은 황제의 권위를 강조했지만, 그 화려함 속에는 주권을 빼앗긴 민족의 아픔이 깃들어 있다. 홍릉 비각 표석의 ‘前大韓’ 표현을 둘러싼 일본과의 갈등은 대한제국의 자주성을 지키려 했던 노력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역사적 맥락을 담고 있다.
‘왕릉팔경’ 프로그램은 단순히 과거를 되짚는 시간을 넘어, 미래 세대가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이어갈 것인가를 묻는 자리이다. 오늘날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왕릉은 그 자체로 아름답지만, 그 뒤에 담긴 역사와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오늘의 의미를 되새기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