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여권지수가 만들어진 지 20년 만에 미국 여권의 세계적 위상이 사상 최저 수준으로 추락하며, 처음으로 최상위 10위권 밖으로 밀려나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2014년에는 부동의 1위를 차지했던 미국 여권은 이제 말레이시아와 함께 공동 12위로 내려앉았다. 이는 미국 여권 소지자가 비자 없이 입국할 수 있는 전 세계 227개 목적지 중 180곳에 불과하다는 사실과 맞물려, 미국의 글로벌 영향력 약화에 대한 우려를 증폭시키고 있다.
미국 여권의 이러한 하락세는 일련의 ‘입국 허용 변화’에 기인한다. 특히 상호주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으면서 발생한 결과다. 올해 4월, 브라질이 미국 시민에 대한 비자 면제를 철회한 것이 시작이었다. 뒤이어 중국이 급속도로 확대되는 무비자 입국 대상국 명단에서 미국을 제외시켰고, 파푸아뉴기니와 미얀마 역시 자국의 입국 정책을 조정하면서 미국의 점수는 더욱 하락했다. 가장 최근에는 소말리아의 새로운 전자비자 시스템 도입과 베트남의 미국 제외 결정이 결정적인 타격을 주며, 결국 미국을 ‘톱 10’ 자리에서 밀어내는 결과를 초래했다.
현재 미국 여권 소지자는 180개 목적지에 비자 없이 입국할 수 있지만, 정작 미국이 자국 입국을 비자 없이 허용하는 국가는 단 46개국에 불과하다. 이러한 ‘비자 면제 접근성’과 ‘입국 개방성’ 간의 격차는 세계에서 가장 큰 수준으로, 호주에 이어 두 번째로 넓은 격차를 보이며 캐나다, 뉴질랜드, 일본보다도 앞선다. 워싱턴 소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시니어 어소시에이트 애니 포르자이머는 이러한 미국의 후퇴가 정치적 요인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분석하며, 트럼프 전 대통령 임기 이전부터 이미 미국의 정책이 내향적으로 변하고 있었고, 이러한 고립주의적 사고방식이 미국 여권의 위력 약화로 이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러한 상황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는 것은 중국의 부상이다. 지난 10년간 헨리 여권지수에서 가장 큰 상승세를 보인 국가 중 하나인 중국은 2015년 94위에서 2025년 현재 64위로 올라섰으며, 그동안 비자 없이 입국할 수 있는 목적지가 37곳 늘어났다. 헨리 오픈니스 지수에서도 중국은 눈에 띄게 상승하여 현재 65위에 올라 있으며, 76개국에 입국을 허용하고 있어 미국보다 30개국이 더 많다. 최근 러시아에 대한 무비자 입국 허용을 포함한 일련의 조치는 베이징이 추진하는 ‘개방 확대 전략’을 명확히 보여준다. 걸프 지역 국가들, 남미, 그리고 여러 유럽 국가들과의 신규 협정을 통해 중국은 세계 이동성의 강자로 자리매김하며, 여행 자유도 측면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지배적 위치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그랜트손턴 차이나의 파트너 팀 클랫 박사는 트럼프의 재집권이 미국의 이동성을 약화시키는 새로운 무역 갈등을 초래했지만, 중국의 전략적 개방은 자국의 글로벌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다고 보며, 이러한 상반된 경로는 향후 전 세계의 경제 및 여행 질서를 재편할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 여권의 위상 하락은 전례 없는 ‘대체 거주권 및 시민권’ 수요 급증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이는 글로벌 이동성과 소프트파워의 역학 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개방성과 협력을 수용하는 국가들이 앞서 나가고 있지만, 과거의 특권에 안주하는 국가들은 뒤처지고 있는 상황으로 분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