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사회가 기후위기 공동 대응에 실패하면서, 기후변화 규범이 파편화되고 보호무역주의 흐름이 강화되는 추세이다. 특히 미국과 EU를 중심으로 기후대응과 통상정책을 연계하는 정책 도입이 가시화되면서, 2024년부터는 이러한 흐름이 더욱 뚜렷해질 전망이다. 이는 한국 기업들에게 수출 제품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 탄소감축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강력한 시그널을 보내고 있다.
지난 30년간 국제사회는 느슨한 공동규범 하에서 각 국가별 상황을 고려해 기후변화 대응 속도를 자율적으로 조절해왔다. 그러나 기후위기가 심화되고 미·중 갈등, 러·우 전쟁 등으로 국제협력 기반이 약화되면서 이러한 접근 방식은 한계를 드러냈다. 결과적으로 기후변화 규범은 점차 파편화되고 있으며, 미국과 EU는 보호무역주의 흐름 속에서 기후대응과 통상정책을 연계시키는 정책을 경쟁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했다. 2024년에는 이러한 기후-통상 연계의 이행 경과가 더욱 가시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예를 들어,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시행으로 인한 본격적인 투자 실행과 EU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의 보고의무 시행 등이 예정되어 있다. 또한, 다양한 기후-통상 연계 법안들이 입법 과정을 거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글로벌 흐름 속에서 한국 기업들은 제품의 탄소배출량을 줄이는 것이 곧 기업 경쟁력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해야 한다. 수출 제품의 가치사슬 전반에 걸친 탄소배출량을 측정하고 이를 줄이기 위한 노력이 필수적이다. 이는 ‘원산지 증명’이라는 기존 통상 기준에 ‘탄소배출량’이 새로운 기준으로 추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전기차 보조금 개편안’ 사례처럼, 자동차 부품 생산 및 완성차 조립 과정에서의 탄소 배출량이 적을수록 보조금 혜택이 커지는 방식은 한국 기업의 상대적 탈탄소 속도가 수출 제품의 가격 경쟁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됨을 시사한다. 따라서 이제는 기업 제품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탄소감축 전략 수립이 시급하며, 기후-통상연계 대상 품목은 전기차, 철강 등을 시작으로 다양한 제품 및 소재로 확대될 것이 자명하다.
기후-통상 연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핵심 수단은 바로 기후기술 확보이다. 글로벌 기업들은 초불확실성 속에서도 에너지 전환 투자 전략을 유지하거나 오히려 더 집중하고 있다. 2022년 5월 글로벌 투자회사 및 에너지 기업 고위경영진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향후 18개월 내 투자 분야로 ‘탈탄소/저탄소 기술’이 42%로 가장 높은 응답률을 기록한 바 있다. 또한, 2023년 9월 설문에서는 전 세계 투자회사 및 에너지기업 고위경영진 및 프로젝트 매니저의 90%가 지난 1년간 에너지 전환 전략에 기존보다 더 집중하거나 유지했다고 응답하며,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에너지 전환 투자를 늘릴 의지를 보였다. 이러한 추세의 동인으로는 △기술 가격 하락과 확산의 선순환 (예: 태양광 설비 가격 10분의 1 수준 하락) △미국 IRA, EU NZIA 등 정부 지원에 기반한 산업정책의 확산 △새로운 시장을 선점하려는 강한 의지 (예: 메탄올 추진 초대형 컨테이너선 발주) 등이 꼽힌다.
하지만 한국 기업들은 몇 가지 특수성으로 인해 이러한 글로벌 동인들을 적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전력망의 고립성, 유연하지 못한 전력시장, 제한적인 자연자원 등으로 인해 기술 가격 하락 효과가 충분히 체감되지 않는다. 또한, 수출 지장 최소화를 위한 방어적 대응에 집중하며 탄소중립 투자 활성화에는 둔감한 상황이며, ‘fast follower’에 익숙한 한국 기업에게 ‘first mover’로서의 시장 선점 투자는 다른 세상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 있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한국 기업들은 단기 감축 규제 및 기술 지원에 대한 정책 시그널이 불명확한 상황에서 기후기술 확보를 위한 투자 의사결정을 내려야 하는 어려운 현실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효과적인 투자 의사결정을 돕기 위해 데이터 기반의 특허 빅데이터 활용이 절실하다. 전체 기술 정보의 80%를 설명하는 특허 데이터를 기반으로 유망 분야 선정, 핵심 기술 파악, 접목 기술 색인, 기술 벤치마킹, M&A 타겟팅, 기술 가치 평가 등에 활용한다면, 기후 기술 확보 전략 및 투자 의사결정의 불확실성을 크게 줄일 수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의 분석에 따르면, 2050년 탄소중립 달성을 위해 필요한 기술 중 35%는 아직 시장에 출시되지 않았거나 시장 경쟁력을 갖추지 않은 기술이다. 이는 재생에너지, 전기화, 에너지효율, 수소, 탄소 제거 등의 분야에서 아직 상용화되지 않은 기술이 상당수 존재하며, 시장 선점 기회가 여전히 열려 있음을 의미한다.
한편, 2023년 12월 개최된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 결과는 한국 정부와 기업 모두에게 중요한 후속 조치를 요구하고 있다. COP28 결정문에는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용량 3배 확대, 에너지 효율 2배 개선, 2050년 탄소중립 달성 등 구체적인 합의 사항이 담겨 있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는 2024년까지 2030년 국가감축목표 달성 경과를 포함한 격년투명성보고서를 제출하고, 2025년까지는 2035년 국가감축목표를 유엔에 제출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한국 정부는 1~2년 내에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 및 제4차 배출권거래제 계획기간(2026년~2030년) 배출 허용량 확정 등 국가 법정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이처럼 국제사회의 합의는 한국 정부의 정책 변화를 촉발하고, 이는 결국 기업들에 대한 기후변화 대응 요구 증대로 이어질 것이다. 따라서 한국 기업들은 기후-통상 연계 가시화, 기후기술 경쟁 가속화, 한국의 특수성, 그리고 COP28 결과에 따른 국내외 후속 조치들을 면밀히 모니터링하며 전략을 지속적으로 갱신해야 한다. 나아가 국내외 정책 및 전략 형성 과정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이해관계자와의 소통을 강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모호한 정책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민간 실무 현황을 정부 및 입법 담당자들에게 정확히 전달하며, 고객사 및 공급망 파트너들과 전략적으로 협력하는 것이 지금 한국 기업들에게 요구되는 최우선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