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대한민국 산업 발전의 중요한 축이었던 포경업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흔적을 간직한 채 새로운 문화 공간으로 재탄생한 장생포의 이야기가 주목받고 있다. 과거 고래잡이 산업으로 번성했던 장생포는 이제 고래를 단순히 소비하는 장소를 넘어, 사라진 산업과 생업, 그리고 포경선에 대한 애도와 향수를 담아내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장생포의 고래 문화는 과거의 유산과 현재의 재해석이 공존하며 도시의 기억을 되살리고 공동체의 내일을 준비하는 의미를 지닌다.
장생포는 선사시대부터 고래가 서식하던 깊은 바다로서, 반구대암각화의 고래잡이 그림과 곳곳에서 발견되는 고래 유물들이 이를 증명한다. 동해와 남해가 만나는 지리적 이점과 태화강, 삼호강 등에서 유입되는 풍부한 먹이는 고래에게 최적의 서식지이자 번식 장소를 제공했다. 특히 ‘귀신고래’라 불리는 회색고래가 자주 출몰하며 장생포는 고래 산업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이러한 자연적 조건을 바탕으로 장생포는 어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으며, 수출입 선박과 대규모 냉동 창고가 즐비했던 산업 도시로 성장했다. 1973년 남양냉동을 시작으로 여러 냉동 가공 공장이 들어섰으나, 경영 악화로 문을 닫는 곳들이 생겨나며 냉동 창고들은 점차 주인을 잃었다.
폐허가 된 냉동 창고들은 2016년 울산 남구청이 부지와 건물을 매입하면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2021년 개관한 장생포문화창고는 총 6층 규모의 복합 문화 예술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이곳은 소극장, 녹음실, 연습실을 갖춰 지역 문화 예술인들의 활동 거점 역할을 하며, 특별 전시관, 갤러리, 미디어 아트 전시관 등을 통해 다채로운 문화 경험을 제공한다. 특히 어린이를 위한 ‘에어장생’ 체험 프로그램과 조선 시대 화가들의 작품을 미디어 아트로 재현한 ‘조선의 결, 빛의 화폭에 담기다’ 전시 등은 세대를 아우르는 매력으로 방문객들을 사로잡고 있다. 수십 년 된 냉동 창고의 문을 그대로 살려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로 활용하는 등 업사이클링의 좋은 사례를 보여준다.
문화창고 내 2층에 상설 전시된 ‘울산공업센터 기공식 기념관’은 장생포의 또 다른 중요한 역사적 단면을 보여준다. 울산석유화학단지는 대한민국 중화학공업의 중심지로서 ‘한강의 기적’을 이끄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급격한 산업 발전 과정에서 온산국가산업단지의 제련소, 석유화학공장 등에서 배출된 중금속으로 인해 주민들이 ‘온산병’이라 불리는 중금속 중독 질환을 겪는 아픔도 있었다. 이러한 과거의 경험은 현재 우리가 지난 역사에서 배우고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해야 함을 시사한다.
장생포의 고래 산업은 1946년 최초 조선포경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 본격화되었으나, 1986년 국제포경위원회(IWC)의 상업 포경 금지 결정으로 100년도 안 되는 짧은 역사를 뒤로하고 막을 내렸다. 현재 장생포에서는 주로 혼획된 밍크고래 등을 합법적으로 유통하는 고래요릿집들이 명맥을 잇고 있다. 천정부지로 치솟은 고기 값에도 불구하고, ‘희소성과 금지의 역설’은 고래고기를 여전히 특별한 음식으로 인식하게 한다. ‘일두백미’라 불리는 고래고기는 한 마리에서 최소 12가지 이상의 다채로운 맛을 선사하며, 부위마다 고유한 식감과 풍미를 자랑한다. 삶은 수육과 생회가 어우러진 모둠수육은 쇠고기를 닮은 붉은 살코기와 쫄깃한 껍질, 풍미 가득한 ‘우네’와 ‘오배기’ 등 여러 고급 부위를 맛볼 수 있다.
장생포의 고래요릿집은 단순한 식사 장소를 넘어, 사라진 산업과 생업, 그리고 포경선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내는 애도와 향수의 공간으로 기능한다. 고래를 꿈꾸던 어부들, 고래고기로 단백질을 보충했던 이들, 그리고 한강의 기적을 일군 산업 역군들을 기리는 문화적 지층이 이곳에 쌓여 있다. 장생포의 고래는 사라졌지만, 그 유산은 고래고기를 통해, 그리고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재해석하는 문화 콘텐츠를 통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장생포는 이처럼 과거의 아픔과 영광을 품고, 도시의 기억을 되새기며 공동체의 미래를 준비하는 중요한 장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윤희 방송작가, 로컬문화 전문가는 이러한 장생포의 이야기를 통해 과거의 산업 유산이 어떻게 현재의 문화와 결합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