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 미국 토니상 시상식에서 6개 부문을 석권하는 쾌거를 이루며 한류의 글로벌 성공 역사를 새롭게 쓰고 있다. 에미상, 그래미상, 오스카상, 토니상을 모두 석권하는 EGOT라는 말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다. 이러한 괄목할 만한 성과 앞에서, 28년 전 한국 대중문화가 세계로 뻗어 나가는 ‘한류’라는 거대한 흐름의 시작을 되짚어보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류의 시작점을 두고 학계에서는 다양한 논의가 존재한다.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는 시점은 1997년이다. 바로 그해 6월 15일, 중국 CCTV에서 MBC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가 ‘아이칭스션머’라는 제목으로 처음 방영된 날이다. 1991년부터 1992년까지 방영된 이 55부작 주말 드라마는 당시 한국에서 최고 시청률 64.9%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던 작품이다. 하지만 <사랑이 뭐길래>를 단순히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로 기억하는 것은 한류의 관점에서 그 의미를 축소하는 것이다. 이 드라마는 중국에서 1992년 한중수교 이래 가장 큰 반향을 일으킨 한국 드라마로 기록된다. 매주 일요일 아침, 중국 가정 안방에서는 한국의 대가족이 등장했고, 이 드라마는 중국에서 시청률 4.2%, 평균 시청자 수 1억 명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남겼다. 종영 후에도 재방송 요청이 쇄도했으며, CCTV는 2차 방영권을 구매하여 1998년 저녁 시간대에 다시 편성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사랑이 뭐길래>의 중국 내 선풍적인 인기는 한국 대중문화가 세계 시장에서 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며 한류라는 거대한 파도의 시작을 알렸다.
물론 한류의 기원에 대한 논의가 <사랑이 뭐길래> 방영 시점인 1997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드라마 <질투>(중국 명칭 ‘녹색연정’)가 방영된 1993년을 원년으로 보는 학설도 있으며, 영화 <쥬라기 공원>의 아젠다가 한국 사회에 대중문화 콘텐츠 산업의 중요성을 각인시킨 1994년설도 있다. 또한, 기획사 SM의 출범, CJENM의 영상 산업 진출, 뮤지컬 <명성황후> 초연 등이 이루어진 1995년을 기점으로 보기도 한다. 1995년 설은 올해가 2025년임을 고려할 때 더욱 자주 언급되고 있다. 더 나아가 중국 언론이 한국 드라마와 K팝 그룹 클론, HOT의 인기를 ‘한류(韓流)’라고 명명한 1999년 11월 19일을 기원으로 보는 주장도 존재한다.
그러나 여러 학설 중에서도 <사랑이 뭐길래>를 한류의 기원으로 보는 시각이 가장 강력하고 설득력을 얻는 이유는 그 화제성, 상징성, 그리고 실질적인 영향력 때문이다. 비록 ‘용어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현상으로서의 한류가 시작되었다’는 의견도 존재하지만, 학계와 업계에서는 1997년 <사랑이 뭐길래>의 중국 방영을 한류의 출발점으로 널리 인식하고 있다. 이 시점을 기준으로 할 때, 한류의 역사는 아직 30년이 채 되지 않았다는 점은 새삼 놀라움을 안겨준다. 30년은 한 세대에 해당하는 시간으로, 긴 세월은 아닐 수 있으나 시대 구분을 짓는 중요한 지점이 될 수 있다. 이처럼 한류의 원년을 둘러싼 논의는 한국 대중문화가 이룬 성과에 대한 자긍심과 더불어, 부정적인 이미지를 극복하고자 하는 한국인의 열망이 담겨 있다고 분석된다.
<사랑이 뭐길래>의 성공 이후, 중국이 한국 대중문화를 받아들인 배경에는 서구 문화에 대한 경계심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느껴졌던 한국 문화가 대체재로 소비될 수 있었다는 분석이 있다. 실제로 필자는 과거 저서를 통해 중국이 문화할인율이 낮은 한국 대중문화를 소비하고 있다고 진단한 바 있으며, 당시에도 중국 당국은 일정 수준 이상의 한류에 대해 제동을 걸고 있었다. 이후 사드(THAAD) 사태를 계기로 전면적인 ‘한한령’이 시행되기도 했다.
하지만 한한령에도 불구하고, 혹은 오히려 한한령을 계기로 한류와 K-콘텐츠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BTS, 블랙핑크, 영화 <기생충>, 드라마 <오징어 게임> 등은 중국 시장과 무관하게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며 한류의 글로벌 확장을 이끌었다. 이러한 성과는 중국의 ‘한류 잘 되라고’ 내린 조치가 아닌, 문화 콘텐츠 현장의 창작자들이 치열하게 노력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 점화된 한류는 한국 대중문화의 무한한 가능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에는 한국 드라마나 가요를 폄하하는 시각도 존재했지만, <사랑이 뭐길래>의 성공은 K-콘텐츠의 높은 완성도, 보편적인 매력, 그리고 치열한 내부 경쟁을 통해 형성된 제작 역량을 증명했다. 이후 드라마 <겨울연가>, <대장금>, <별에서 온 그대>, <태양의 후예>를 거쳐 <기생충>, <오징어 게임>으로 이어지는 영상 콘텐츠의 발전과, 2011년 SM의 파리 공연을 시작으로 BTS, 블랙핑크, 스트레이키즈, 세븐틴 등이 K팝의 위상을 드높인 역사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처럼 28년 전 <사랑이 뭐길래>에서 시작된 한류의 역사는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의 토니상 6관왕이라는 쾌거로 이어지며 한류의 성공 서사에 또 다른 중요한 이정표를 세웠다. 대학로에서 시작된 작은 공연 예술 콘텐츠가 세계 최고 권위의 시상식에서 작품성을 인정받는 것은, 과거 EGOT라는 단어가 한국과는 무관한 먼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졌던 시절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이제 한국은 EGOT를 완성하고 있으며, 이는 28년 전 <사랑이 뭐길래>가 중국 땅에서 불러일으킨 작은 물결이 거대한 해류가 되어 세계로 뻗어 나가고 있음을 증명하는 상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