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태평양 시대라는 새로운 지정학적 국면을 맞아 한국과 아세안(ASEAN)의 관계가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CSP: Comprehensive Strategic Partnership)’로 격상되면서, 양측은 단순한 외교적 관계 개선을 넘어 공동 번영을 향한 전방위적 협력의 시대를 열게 되었다. 이는 글로벌 도전과 기회에 함께 맞서고자 하는 양측의 의지를 상징하는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으로 분석된다.
기존 한-아세안 관계는 1989년 부분 대화상대국으로 시작해 3년 만에 정식 대화상대국으로 격상되는 등 35년간 경제, 투자, 인적 교류를 중심으로 꾸준히 확대되어 왔다. 그러나 싱가포르 정부 산하 동남아시아연구소(ISEAS)의 여론조사 결과에서 나타나듯, 아세안 내 엘리트층이 인식하는 한국의 영향력은 여전히 제한적인 수준이라는 지적이 있어왔다. 또한, 미국, 중국 등 강대국뿐만 아니라 여타 중견국과 비교했을 때 아세안에게 한국의 전략적 가치가 상대적으로 크지 않다는 점은 그동안 양측 관계 발전의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CSP 격상은 한-아세안 관계를 보다 포괄적이고 획기적인 단계로 견인할 수 있는 중요한 촉매제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특히 한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서 아세안은 가장 중요한 협력 파트너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이는 한국의 외교·안보 및 경제적 이익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2022년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발표한 한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서 아세안을 최우선 협력 대상으로 강조하고, 한-아세안 연대구상(KASI)을 핵심 정책으로 제시한 것은 이러한 인식을 명확히 보여준다. 남중국해를 비롯한 해양 동남아시아 지역의 항행의 자유와 안정된 해양 질서 유지는 한국의 핵심 이익과 직결되는 문제이며, 아세안은 핵심 광물 공급망 안정성 확보와 경제안보 협력 강화에도 필수적인 지역이다. 또한, 아세안은 한국의 개발 협력 노력이 집중되는 중요한 지역이기도 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0월 10일 라오스 비엔티엔에서 열린 한-아세안 정상회의에서 “한국과 아세안은 이제 새로운 미래의 역사를 함께 써 나갈 것”이라며 “공동 번영을 위한 파트너로서 앞으로 전방위적이고 포괄적 협력을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정상회의는 이러한 비전을 구체화하고 실질적인 협력 강화를 위한 다양한 방안을 제시하는 성과를 이끌어냈다.
먼저, 국방 및 경제안보 분야에서의 협력이 한층 강화될 전망이다. 오는 11월에는 첫 국방장관 대면 회의가 개최될 예정이며, 이는 양측 간 안보 협력의 새로운 장을 열 것으로 보인다. 또한, 2025년에는 한-아세안 간 경제안보 및 통상 분야 협력을 확대하기 위한 ‘한-아세안 경제·통상 싱크탱크 다이얼로그’ 개최를 추진하기로 했다. 더불어, 양측 간 인적 교류를 확대하고 미래 세대 간 우호 협력을 증진하기 위해 향후 5년 동안 아세안 출신 학생 4만 명에 대한 연수 프로그램을 추진할 계획이다.
둘째, 윤석열 대통령은 이번 정상회의에서 ‘8·15 통일 독트린’의 중요성을 소개하며 아세안 국가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이는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국제사회의 공조를 강화하고, 한반도의 평화가 아세안 지역의 평화와 안정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상기시키며 지역 간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셋째, 한·일·중과 아세안 간의 선순환 협력을 제안하며 동아시아 지역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는 한국이 아세안과의 관계를 CSP로 격상함에 따라, 한-아세안 관계와 아세안+3 간의 선순환 협력을 주도하려는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이번 정상회의는 우리 외교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아세안 지역은 한국의 글로벌 중추 국가 외교를 구현하는 데 중요한 협력 지역이며, CSP 격상은 이를 이행하는 데 있어 아세안 내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상대적으로 호혜적이고 이익균등적인 협력 대상 지역인 아세안과의 관계 격상은 이러한 점을 잘 반영한 것으로 평가된다. 아세안은 한국의 주요 시장이자 교역 파트너일 뿐만 아니라, 중요한 해상 교통로를 제공하고 풍부한 노동력을 공급하는 등 경제·전략적 가치가 매우 높다. 또한, 현 정부가 ‘한-아세안 연대구상(KASI)’을 통해 해양 안보, 사이버 안보, 아세안 방위 역량 강화 협력 등 포괄 안보 협력 확대를 강조하며 아세안과의 실질적인 ‘포괄적(comprehensive)’ 전략 협력을 본격화했다는 점에서 이번 관계 격상은 큰 의미를 갖는다. 그동안 한-아세안 관계는 경제 및 사회·문화 협력은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지만, 안보 협력이나 아세안 지역 정세에 대한 한국의 적극적 관여 측면에서는 부족함이 있었다는 지적이 있어왔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한국과 아세안이 평화, 번영, 상생을 위한 미래 동반자로서 새로운 35년을 함께 일궈 나가기를 기대한다”는 메시지처럼, 앞으로 한-아세안 관계의 격상에 대한 아세안의 기대는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이번 정상회의를 통해 한-아세안 협력은 새로운 도약을 향한 발걸음을 내디뎠으며, 이 긍정적인 모멘텀을 이어가고 미래 동반자로서 새로운 35년을 만들어가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