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5년 봄, 18년 만에 국민연금 개혁 논의가 일단락되며 역사적 결단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도출했다. 국민연금은 도입 이후 5년마다 재정계산을 통해 개혁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되었으나, 번번이 논의가 유예되는 상황을 반복해왔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보험료율 13%, 소득대체율 43%로 인상하는 모수개혁안이 통상 세 번째 개혁으로서 일단락된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성과다. 하지만 이번 개혁이 지속가능성을 위한 ‘완결’이 아닌 ‘출발점’으로서 갖는 진정한 의미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과제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번 개혁안은 국민이 감내할 수 있는 수준에서 부담을 높이는 동시에 노후소득 보장성을 일정 수준 강화하는 정치적 절충안으로 평가된다. 이는 단기적으로 기금고갈 시점을 8~15년 연장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특히, 당장 수년간은 적립기금을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보험료 수입만으로 연금 지출을 충당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재정 구조의 변화는 기금의 운용수익이 재정의 한 축으로 온전히 유지될 수 있도록 하며, 기금운용수익이 훼손될 수 있던 위기 국면에서 ‘급한 불’을 끄고 보다 근본적인 구조개혁을 위한 시간적 여유를 확보할 수 있게 한다. 즉, 이번 개혁은 제도의 ‘완결’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연금을 향한 로드맵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국민연금 도입 37년 만에 제도 설계 당시 결정되었던 ‘3-6-9% 인상계획’ 이후 처음으로 보험료율 인상이 단행되었다는 점은 이번 개혁의 역사적 의미를 더한다. 1988년 3%로 시작하여 1998년 9%까지 단계적으로 인상된 보험료율은 27년간 동결되어 있었다. 이번 9%에서 13%로의 보험료율 인상은 단순한 재정수지 보전 조치를 넘어, 연금재정의 운영 방식을 전통적인 부과방식(pay-as-you-go)에서 기금을 축적하고 운용하는 준적립방식(partially funded)으로 전환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깊은 의의를 가진다.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한국의 상황에서, 생산연령인구 1명이 노인 1명을 부양해야 하는 ‘울트라 고령사회’ 진입을 앞두고 연금재정 설계는 세대 간 정의와 제도의 존속을 위한 핵심적 관건이 된다.
다행스럽게도 한국은 아직 기금이 존재하는 시점에서 선제적 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다. 1,200조 원 이상의 적립기금을 보유하고 있으며 현재도 기금이 계속 쌓이고 있는 구간에 있다는 점은 큰 이점이다. 이번 보험료율 인상은 이 기금 누적 구간을 연장하여, 기금운용수익과 보험료수입이라는 두 개의 재정 축이 기능하는 준적립방식의 연금 운영 구조를 제도적으로 가능케 하는 첫걸음이다. 이는 단지 기금고발 시점을 미루는 조치를 넘어, 기금을 유지하고 운용수익을 확보함으로써 제도의 지속가능성을 근본적으로 높이려는 ‘철학적 전환’이라 볼 수 있다. 기금이 존재하는 한, 보험료 수입과 운용수익이라는 두 개의 재정 축은 노동인구 감소의 충격을 흡수할 수 있으며, 적립기금이 잘 운용된다면 미래 세대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보험료 부담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제5차 국민연금 재정계산위원회는 소득대체율 40% 기준으로 보험료율 15%, 수급연령 2048년까지 68세 상향, 기금운용수익률 5.5% 유지 시 70년간 기금 고갈 없이 지속 가능한 연금 모델이 가능함을 시뮬레이션으로 입증했다. 현 개혁안이 적용한 소득대체율 43% 기준에서도 보험료율을 16.5%까지 점진적으로 인상하고 자동조정장치를 도입한다면, 수지균형보험료율인 21.2%보다 낮은 수준에서 준 적립방식 운영이 가능하다.
또한, 이번 개혁안에는 청년세대의 불안을 해소하고 제도 신뢰를 제고하기 위한 조치들도 포함되었다. 국민연금법 제3조의 2 개정을 통해 국가의 연금지급 책임을 명문화하였고, 출산크레딧을 첫째아부터 12개월 인정하며 군복무크레딧도 12개월로 확대하였다. 더불어 저소득자에 대한 보험료 지원 확대 등 청년층의 연금 가입 기간을 보완하고 보장성을 높이기 위한 장치들이 마련되었다.
결론적으로 이번 개혁은 단순한 4%포인트의 보험료 인상을 넘어, 기금이 고갈되기 전 구조개혁을 준비할 수 있는 전략적 시점에 이루어진 역사적 전환이었다. 한국은 연금의 위기 시계가 본격화되기 전, 먼저 대응할 수 있는 소수의 나라 중 하나로서 미래세대를 위한 준비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더불어 이번 개혁은 모수개혁을 넘어 구조개혁 논의를 본격화하는 사회적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향후 개혁 과정에서는 보험료율 추가 인상, 수급연령 상향, 자동조정장치 도입 등 지속가능성 제고를 위한 마스터플랜 수립이 필요하다. 또한, 보장성을 강화하기 위해 기초연금은 빈곤 해소에 집중하고, 국민연금은 소득 비례 연금으로 재편하며, 적용 포괄성과 가입 기간 확대, 퇴직연금의 내실화 등 다층 노후소득체계의 정비 방향도 함께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공적연금은 특정 세대의 이익이 아닌, 세대 간 신뢰를 지키고 공동체 전체의 미래를 위한 사회적 기반 인프라로서, 이번 개혁은 그 원칙을 유지하며 미래를 향한 조심스럽지만 단호한 시도였다. 준 적립방식과 기본 보장의 방향을 따라, 우리 모두가 연금을 다시 성숙하게 논의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