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맞닥뜨리는 ‘갈 곳 없는’ 상황이 남성들에게 극심한 답답함과 함께 부부 갈등의 씨앗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은퇴 후에도 경제적 안정만큼이나 중요한 부부의 화목을 지키기 위해, 낮 시간 동안 각자의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절실하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퇴직한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한 퇴직수기 공모에서 상당수가 “퇴직 후 절벽 위에 서 있는 기분”이라는 소회를 밝혀 충격을 주었다. 60세 정년 보장과 연금 수령이라는 안정적인 환경에도 불구하고, 갈 곳이 없다는 막막함이 이들을 괴롭혔다. 한 고위직 공무원은 퇴직 후 3개월간 집에서 쉬기만 하다 아내 눈치를 보며 답답함을 느꼈고, 결국 노인보호센터에서 월 70만 원의 급여와 건강보험료 30만 원을 충당하며 “무섭던 아내가 천사로 바뀌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이러한 퇴직 후 남편의 ‘재택’으로 인한 부부 갈등은 일본에서 이미 ‘남편재택 스트레스 증후군’ 또는 ‘부원병’으로 불리며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는 퇴직한 남편이 집에 머무르면서 발생하는 스트레스가 아내의 건강 이상으로 이어지는 현상을 일컫는다. 우울증, 고혈압, 천식, 공황장애 등 다양한 증상으로 나타나며, 심지어 중년·황혼 이혼으로까지 이어지는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실제 일본에서는 20년 이상 혼인 관계를 유지한 중년·황혼 이혼의 비율이 1990년 14%에서 2023년 23%로 증가했다.
이러한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우리나라와 일본의 독특한 부부 문화가 지목된다. 오랫동안 남편과 아내가 각자의 세계에서 살아온 결과, 남편의 퇴직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집에 머무르게 되면서 이전에는 신경 쓰이지 않았던 사소한 성격이나 생활 습관이 아내에게 큰 스트레스 요인이 되는 것이다. 일본의 노후 설계 전문가들은 퇴직 후 부부 화목을 위해 낮 시간 동안은 가능한 한 각자 자기만의 시간을 가지라고 조언한다. 심지어 일본에서는 퇴직 후 가장 인기 있는 남편 유형으로 ‘낮에는 집에 없는 남편’을 꼽기도 한다.
우리나라 역시 이러한 퇴직 후 부부 갈등 문제가 빠르게 확산될 우려가 크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경우, 지난 20여 년간 전체 이혼율은 낮아졌지만, 중년·황혼 이혼 비율은 1990년 5%에서 2023년 36%로 급증했다. 이러한 증가세의 배경에는 퇴직 후 부부 갈등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언론과 노후 설계 강의 현장에서도 퇴직 후 부부 갈등에 대한 고민을 빈번하게 접할 수 있다.
따라서 퇴직 후 노후자금 마련만큼이나 부부 화목이 중요하다는 사회적 인식이 절실히 필요하다. 부부 모두 낮 동안 수입을 얻는 일이든, 사회 공헌 활동이든, 취미 활동이든, 혹은 이 세 가지를 겸한 활동이든, 각자 자기만의 시간을 의식적으로 확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각자의 시간 확보는 퇴직 후 찾아올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고,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화목한 노후를 보내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