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가난과 허기를 이겨낸 생존의 방편이었던 음식이 이제는 일상이자 가벼운 별식이 되었다. 이는 쓰레기 처리장이 문화예술복합공간으로 재탄생한 것처럼, 오랜 시간과 인내를 통해 ‘오래 견디고 볼 일’임을 시사한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도시의 쇠락과 재기를 겪었던 지역의 역사, 그리고 그 속에서 발현된 인간의 지혜가 자리하고 있다.
특정 도시를 떠올릴 때 사람들은 경험, 미디어, 예술 작품 등을 통해 형성된 고유한 ‘인상’을 먼저 떠올린다. 부산 출신인 필자의 아버지는 일이 풀리지 않자 누이가 있는 마산으로 이주했다. 40년 전 마산은 ‘마창진’ 통합 이전에도 제법 잘 나가던 도시였다. 마산어시장은 사계절 활기찼고, 한일합섬과 수출자유지역은 도시의 든든한 기반이었다. 당시 마산의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에 다니던 사촌 언니는 낮은 기름때와 먼지 속에서 공부하며 ‘잘 살아보겠다’는 꿈을 키웠다. 이처럼 전국적으로 ‘산업체’ 역군으로 불리던 젊은이들의 헌신은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수도권의 강력한 배후 도시였던 부천 역시 마찬가지였다.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 아남산업, 삼성전자 반도체, 로켓트보일러 공장 등 2,000여 개의 공장이 들어섰고, 사람들은 일자리를 따라 부천으로 몰려들었다. 1975년~80년 전국 인구 증가율이 27.7%였을 때, 부천은 102.9%를 기록했다. 80년대 초 수도권 인근 도시들이 48~56%의 인구 증가율을 보일 때, 부천은 무려 126%로 수직 상승했다. 서울 개발에서 밀려왔거나 지방에서 상경한 이들의 보금자리로서, 부천은 ‘내 집 한 칸 마련’을 꿈꾸는 서민들의 땅이었다. 양귀자의 소설 ‘원미동 사람들’은 이러한 부천 원미동의 풍경을 전국에 알렸고, 가난 속에서도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웃들의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우리 모두의 고향’과 같은 정서를 불러일으켰다.
소설의 배경이 된 부천 원미동에서 약 5km 떨어진 곳에는 ‘로컬100’에 선정된 부천아트벙커B39가 있다. 약 33년 전, 1992년 부천 중동 신도시 건설과 환경부 지침에 따라 부천 삼정동에 쓰레기 소각장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1995년 5월부터 가동된 이 소각장은 하루 200톤에 달하는 서울 및 수도권의 쓰레기를 처리했다. 그러나 1997년, 환경부 조사 결과 이 소각장에서 허가 기준치의 20배에 달하는 고농도 다이옥신이 검출되면서 큰 파장이 일었다. 주민들과 환경 운동가들은 엄격한 관리와 소각장 폐쇄 운동을 벌였고, 결국 2010년 대장동 소각장으로 기능이 이전 및 통합되면서 삼정동 소각장은 가동을 중단했다.
쓸쓸한 폐건물로 남을 뻔했던 이곳은 2014년 문화체육관광부의 ‘산업단지 및 폐산업시설 도시재생 프로젝트’에 선정되면서 2018년 복합문화예술공간 ‘부천아트벙커B39’로 재탄생했다. 과거 쓰레기 소각로였던 거대한 굴뚝과 건물은 현재 ‘에어갤러리(AIR GALLERY)’로 변모하여 하늘과 햇살을 담아내는 공간이 되었다. 소각장의 핵심 공간이었던 ‘벙커(BANKER)’는 지하 깊숙한 곳에서부터 39m 높이의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독특한 공간으로, 쓰레기 반입실은 현재 멀티미디어홀(MMH)로 활용되고 있다. 소각동 2층과 3층에는 펌프실, 배기가스처리장 등 기존의 거대한 설비 기반을 활용한 전시물들이 남아있으며, 중앙청소실은 아카이빙실로 사용되고 있다. ‘RE:boot 아트벙커B39 아카이브展’은 다이옥신 파동과 시민운동, 그리고 이곳이 어떻게 문화예술공간으로 변모했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며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건물을 나서며 만나는 동네 어린이들의 작품으로 꾸며진 벽화는 과거 소각장의 상징인 굴뚝 모양의 나무가 숲을 이루는 과정을 표현하며, 모든 것이 소중하고 사랑스럽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한편, 원미동의 또 다른 이름인 ‘조마루사거리’에는 ‘청기와뼈다귀해장국’과 ‘조마루뼈다귀해장국’ 본점이 마주 보고 있다. 서민들의 애환이 담긴 감자탕과 뼈다귀해장국은 과거 미군 부대에서 나온 돼지 뼈다귀에서 시작되었으며, 저렴한 가격으로 푸짐한 한 끼를 제공하며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1988년부터 원미동에서 시작된 한 식당의 뼈다귀해장국은 깍두기, 양파, 청양고추와 같은 기본 찬과 함께 뚝배기에서 팔팔 끓여 나오는 화끈하고 깊은 맛으로 특별함을 더한다. 두툼한 뼈다귀와 푹 익힌 우거지, 그리고 맑고 깨끗한 국물은 외국인들에게도 K-푸드의 매력으로 다가가고 있다.
가난과 허기를 이겨낸 지혜의 음식은 이제 일상이자 가벼운 별식이 되었다. 쓰레기 처리장이 문화예술복합공간으로 재탄생한 것처럼, 오랜 시간과 노력이 깃든 것들은 결코 헛되지 않으며 ‘아무튼 오래 견디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