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장생포가 과거 번성했던 고래잡이 산업의 역사를 단순히 추억하는 것을 넘어, 그 유산을 재해석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문화 공간으로 변화하고 있다. 과거 ‘고래의 땅’이라 불리며 대한민국 경제를 견인했던 장생포는 이제 사라진 산업과 생업에 대한 애도와 향수를 담은 특별한 장소로 우리 앞에 서 있다. 이곳의 고래 요릿집들은 단순한 식사 공간을 넘어, 과거를 음미하고 도시의 기억을 되새기며 공동체의 내일을 준비하는 의례적인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다.
장생포는 선사시대부터 고래가 모여들었던 깊은 바다이자, 풍부한 어족 자원으로 인해 번성했던 포경 산업의 중심지였다. 과거에는 ‘개도 만 원 지폐를 물고 다닐 정도’로 경제적 번영을 누렸으며, 수출입 물류의 중심지이자 거대한 냉동 창고들이 즐비했던 산업 도시였다. 그러나 1986년 국제포경위원회(IWC)의 상업 포경 금지 결정으로 인해 장생포의 고래 산업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 했다. 1993년 문을 닫은 세창냉동처럼, 과거 번영의 상징이었던 냉동 창고들은 쇠퇴의 흔적으로 남았다.
이러한 폐허가 된 공간들은 지자체와 시민들의 노력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울산 남구청은 2016년 폐냉동창고 부지를 매입하여 주민 의견을 수렴한 끝에 2021년 장생포문화창고를 개관했다. 총 6층 규모의 문화창고는 과거 산업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다양한 체험장과 전시실을 갖춘 복합 예술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이곳은 지역 문화예술인들의 거점이 되는 소극장, 녹음실, 연습실을 비롯해 특별 전시관, 갤러리, 미디어 아트 전시관 등을 통해 다채로운 문화 경험을 제공한다. 특히 2층의 ‘에어장생’ 항공 체험 프로그램은 어린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재미를 선사하며, 종이 고래 접기 등 다양한 놀이 활동도 마련되어 있다.
또한, ‘조선의 결, 빛의 화폭에 담기다’ 전시회는 정선, 김홍도, 신윤복 등 한국 대표 화가들의 작품을 거대한 미디어 아트로 재현하여 관람객들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고요하고 단아한 한국 수묵화와 풍경화를 사계절과 어우러지게 재구성한 미디어 아트는 시민들에게 새로운 감성을 일깨우려는 ‘고래문화재단’의 노력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수십 년 된 냉동 창고 문을 그대로 활용한 갤러리는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며, 과거 산업 시설을 문화 예술 공간으로 재탄생시킨 업사이클링의 좋은 사례를 보여준다.
문화창고 내에서도 특히 ‘울산공업센터 기공식 기념관’은 많은 이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울산석유화학단지가 대한민국의 산업 심장부로서 ‘한강의 기적’을 이끌었던 역사와 과정을 보여주는 이 공간은, 당시 산업 현장을 온몸으로 체험했던 중장년층에게 깊은 애잔함을 안겨준다.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던 매캐한 연기와 함께 일본의 ‘이타이이타이병’과 유사한 ‘온산병’과 같은 극심한 중금속 중독 질환을 겪어야 했던 과거의 아픔도 솔직하게 보여준다. 상주하는 해설사의 생생한 설명은 울산의 근현대 개발사를 마치 눈앞에 펼쳐지는 듯 느끼게 한다.
이제 장생포의 고래 산업은 과거의 영광으로만 남아있지만, 고래고기는 여전히 이 지역의 명맥을 잇고 있다. 비록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지만, ‘장생포에서 먹어야 제맛’이라는 말처럼 ‘희소성과 금지의 역설’은 고래고기를 더욱 특별한 대상으로 만든다. 12만 원짜리 ‘모둠수육’은 육고기와 닮은 듯하면서도 살코기, 껍질, 혀, 염통 등 다양한 부위에서 다채로운 맛을 선사한다. 특히 ‘우네’와 ‘오배기’와 같은 고급 부위는 고래 특유의 맛과 식감을 극대화하며, 조리법과 소스에 따라 변화하는 풍미는 ‘일두백미’라는 말처럼 다채로운 경험을 제공한다.
결론적으로, 장생포의 고래 요릿집들은 단순히 음식을 소비하는 장소를 넘어, 사라진 산업과 생업에 대한 ‘애도와 향수’를 담은 공간이다. 과거 고래로 꿈꿨던 어부들, 고래 고기로 단백질을 보충했던 피란민들, 그리고 ‘한강의 기적’을 일군 산업 역군들을 기리는 문화적 지층이 이곳에 쌓여 있다. 장생포의 고래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고래고기를 통해 그 시간과 기억은 여전히 우리의 혀끝과 마음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장생포문화창고는 이처럼 과거의 유산을 보존하고 재해석하며, 공동체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준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