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릉과 궁궐이 새로운 여행 프로그램으로 재탄생했지만, 그 배경에는 일제강점기라는 아픈 역사와 주권 상실이라는 비극적인 현실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가 11월 10일까지 총 22회에 걸쳐 운영하는 「2025년 하반기 왕릉팔(八)경」 프로그램은 단순한 문화유산 답사를 넘어, 대한제국 황실의 쇠망과 함께 변모해 간 능묘 문화를 탐색하며 미래 세대의 역사 인식을 제고하려는 노력을 담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구리 동구릉에서 시작해 남양주 홍릉과 유릉까지 이어지는 여정을 통해, 조선 왕릉의 장엄함과 대한제국 황릉의 독특한 양식을 비교하며 역사의 굴곡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특히 이번 여정은 조선 왕실 중심이 아닌 대한제국 황실 관련 유적을 중심으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는 곧 격동의 근대 전환기를 살아낸 황실의 고뇌와 함께, 주권을 잃었던 민족의 아픔을 되새기는 기회가 된다.
동구릉은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을 비롯해 9기의 능침이 모여 있는 조선 최대 규모의 능역이다. 이곳에서는 1408년 태조의 건원릉 건립부터 현종의 숭릉까지, 조선 전기부터 후기까지 다양한 시대의 능묘 양식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해설사는 능역의 구조, 제향의 의미, 그리고 능묘에 담긴 정치적 배경을 상세히 설명하며 참가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특히 조선 왕릉 표석의 기원이 송시열의 상소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는, 예법의 엄격함과 기억을 보존하려는 노력이 역사 속에 어떻게 녹아들었는지를 보여준다. 표석의 전서체 또한 송시열의 주장으로 정착되어 왕릉 제도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이다.
순종황제의 능행길은 이번 프로그램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순종은 대한제국의 제2대 황제이자 조선의 마지막 황제라는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1908년 순종이 반포한 「향사리정에 관한 건」 칙령은 제사 횟수를 줄여 1년에 두 번으로 축소했지만, 이는 모든 능에 해당하지는 않았다. 종묘 정전에 모셔진 왕과 왕비의 능은 명절제와 기신제를 모두 지냈지만, 그렇지 않은 능에서는 명절제만 지냈다. 이러한 제사 제도의 변화와 혼선은 대한제국이 겪었던 정치적 불안정성을 반영한다. 오늘날 명절제 대신 기신제가 중심으로 남아 제사가 단절되지 않고 이어져 온 점은, 조선 왕릉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는 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동구릉의 가장 높은 자리에 자리한 건원릉은 태조 이성계의 유훈에 따라 봉분을 덮은 억새로 유명하다. 태조의 고향에 대한 애정과 후손들의 계승 의지가 6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건원릉의 표석에 ‘대한 태조 고황제 건원릉’이라 새겨진 것은 태조의 위상을 황제로 격상해 전하며 왕릉 제도와 예제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가 된다. 봉분 주위의 병풍석, 난간석, 호랑이와 양 석상, 망주석, 곡장 등은 왕을 사후에도 국가의 영원한 군주로 기억하게 하는 상징적인 요소들이다. 제향이 봉분 아래 정자각에서 올려지고, 혼유석, 문인석, 무인석, 석마 등은 왕을 받들던 신하와 장수, 왕의 위엄을 상징하며 왕릉의 위상을 더한다.
정자각은 왕릉의 핵심 의례 공간으로, 제물을 차리고 제사를 지내는 중심 건물이다. 계단은 제물, 제관, 왕이 오르는 길이 구분되며, 혼이 다니는 신로와 제관, 왕이 이용하는 어로가 분리되어 산 자와 죽은 자의 구분을 상징한다. 영조 때부터 중국 제도를 본떠 축문을 태우는 방식이 정착된 것도 제사의 변화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추존왕의 능에서는 생전에 왕이 아니었으나 아들이 왕위에 오르면서 추존된 왕들의 무덤을 만날 수 있다. 이들의 무덤 역시 ‘능’이라 불리지만, 정통 왕릉과는 차이가 있다. 태조 건원릉에 호랑이와 양이 네 쌍씩 세워진 것과 달리, 추존왕의 능에는 절반만 배치해 구분했다. 왕릉은 망자의 영역인 봉분이 있는 언덕과 산 자와 죽은 자가 제사를 통해 만나는 제향 공간으로 나뉜다. 이곳에는 임금의 업적을 기록한 신도비와 무덤의 주인을 알리는 표석이 세워졌다. 건원릉의 신도비에는 ‘역신 정도전’과 ‘공신 봉화백 정도전’이라는 상반된 기록이 있어 당시 정치적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추존왕의 능 중에는 익종(효명세자)과 신정왕후의 무덤처럼 합장릉도 있다. 봉분이 하나지만 표석에 함께 모셔졌음을 알 수 있으며, 신정왕후의 지위가 높아 왕이 오른쪽, 왕비가 왼쪽에 자리하는 원칙과 달리 배치가 달라진 사례는 당시의 서열 의식이 왕릉 공간에도 반영되었음을 보여준다.
경릉은 헌종과 두 왕비(효현왕후, 효정왕후)가 합장된 삼연릉으로, 세 기의 봉분이 나란히 배치된 유일한 사례다. 이곳의 비석은 대한제국 시기에 새겨졌으며, 여러 차례 다시 새겨진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이는 석비 제작에 따른 경제적 부담을 최소화하려 했던 당시의 사정을 보여준다. 홍릉의 비각 표석은 대한제국과 일본 간의 갈등을 보여주는 역사적 맥락을 담고 있다. 일본의 ‘前大韓(전대한)’이라는 표현 주장을 대한제국이 반대한 끝에 수년간 방치되었으나, 홍릉 참봉 고영근이 일본의 눈을 피해 비문을 완성해 놓았다는 이야기는 당시의 굴욕적인 상황을 짐작게 한다.
홍릉과 유릉은 기존 조선 왕릉의 형식을 벗어나 대한제국 황릉의 양식을 따른다.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체제를 전환한 것처럼, 능의 조영 방식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석물의 배치, 봉분의 규모, 향어로의 장식은 황제의 권위를 강조했지만, 그 화려함 속에는 주권을 빼앗긴 민족의 아픔이 깃들어 있었다.
홍릉과 유릉을 돌아보며 마주한 화려한 석물과 질서정연한 배치는 위엄을 풍겼지만, 그 속에는 주권을 잃은 황제와 황후의 쓸쓸한 이야기가 함께 잠들어 있었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어린 학생이 “역사학자가 되어 문화유산을 지키고 싶다”는 포부를 밝힌 모습은, 이 길이 단순히 과거를 되짚는 시간이 아니라 미래 세대가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이어갈 것인가를 묻는 자리임을 상기시킨다. 오늘날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왕릉은 그 자체로 아름답지만, 그 뒤에 담긴 역사를 외면하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오늘의 의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