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넘게 빚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국민이 113만 명에 달한다. 이들 중 대다수는 5000만 원 이하의 채무를 가지고 있지만 이미 상환 능력을 상실한 상태다. 신용불량자로 낙인찍혀 금융거래는 물론 취업과 창업의 기회마저 차단된 채 경제 시스템 바깥으로 밀려난 이들의 삶은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피폐해져 있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히 개인의 책임으로만 볼 수 없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이에 정부는 장기 연체채권 채무조정을 위한 배드뱅크 설립을 추진하고, 국회는 배드뱅크 운영 예산 4000억 원과 새출발기금 지원 확대 예산 7000억 원을 신속하게 추가경정예산으로 편성하는 등 전례 없는 속도로 대응에 나섰다. 향후 정부는 금융회사로부터 장기 연체채무를 일괄 매입하여 채무를 소각하는 한편, 새출발기금 지원 대상 확대 및 취약 소상공인에 대한 채무조정 감면 폭을 90%까지 강화하는 등 부채 정리를 위해 총력을 기울일 방침이다. 이번 정책을 통해 약 125만 명이 빚의 굴레에서 벗어나 인간다운 삶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러한 조치는 단순히 빚을 없애주는 것을 넘어, 한계 상황에 놓인 채무자들에게 인간다운 삶으로 돌아올 수 있는 ‘사회적 리셋 장치’를 제공하는 의미를 지닌다. 일부에서는 빚을 갚지 않아도 된다는 잘못된 신호로 작용하여 도덕적 해이를 야기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하지만 정의로운 사회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나 개인의 자유 보장을 넘어 공동체의 가치와 미덕을 함께 추구해야 한다는 마이클 샌델의 지적처럼, 채무조정 프로그램을 통해 재기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공동체의 회복 가능성에 기반을 둔 정의 실현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구조적 불평등과 경제적 고립을 완화하고 사람들을 다시 생산적인 활동 영역으로 불러들이는 것은 지속가능한 사회로 나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세계 주요국들도 장기 연체채무 문제를 개인의 책임이 아닌 사회 구조적 문제로 인식하고 제도적으로 대응해왔다. 미국은 ‘챕터 7’ 개인파산 제도를 통해 일정 기준 이하 채무자의 잔여 채무를 소각하고, 독일은 ‘개인파산 및 채무조정제도’를 통해 일정 기간 변제 노력을 거친 경우 잔여 채무를 탕감하여 경제 복귀를 촉진한다. 영국 역시 ‘부채 구제 명령(DRO)’을 통해 법적 절차에 따라 채무를 소각하며, 이는 고의적 무임승차를 방지하기 위해 엄격한 심사를 거친다. 이처럼 세계는 정부의 정책 지원을 통한 장기 연체채무자 구제가 사회 전체 생산성 향상에 긍정적으로 기여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의 접근이 필요하다. 다만, 단순한 채무 감면에 그치지 않고 엄격한 선별과 책임 있는 기회 제공이 수반되어야 한다. 대상자의 금융정보, 소득, 부동산 보유 내역 등을 면밀히 확인하고 재산 은닉 시 처벌 조항을 명확히 하는 것이 방법이 될 수 있다. 더불어 채무조정과 함께 취업 활동, 직업 훈련, 금융 교육 이수 등 ‘맞춤형 회복 프로그램’을 연계하여 책임 있는 사회 복귀를 유도해야 한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케네스 애로우는 시장 실패를 교정하는 것이 정부의 정당한 역할이라고 말한다. 7년 이상 지속되는 연체는 시장 실패를 의미하며, 이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은 정당하다. 개인의 경제적 실패가 공동체 전체의 생산성 저하로 이어지는 상황을 방치해서는 안 되며, 장기 연체채무자의 경제 활동 복귀는 사회 전체 복원력 회복에 기여함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채무자의 삶을 재설계할 기회를 제공하는 사회와, 낙인을 찍으며 배제하는 사회 중 어떤 사회가 더 건강하고 지속가능한지에 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지금 선택해야 할 것은 바로 그 미래의 방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