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경제는 1990년대 초 이후 고도성장 시대의 막을 내리면서 대외 환경 급변과 함께 소득 분배 악화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직면해왔다. 당시 기업들은 수출 경쟁력 강화를 명목으로 고용 및 임금 인상을 억제하고 비정규직을 선호했으며, 생산 자동화 및 해외 이전으로 대응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한 충격의 비용은 고스란히 가계, 특히 저소득층과 중산층에게 전가되었다. 그 결과 경제에서 가계 소비의 역할은 점차 하락하기 시작했으며, 내수 시장의 취약성은 수출 시장에 대한 의존도를 심화시키는 악순환을 초래했다.
실제로 GDP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1991년 10.3%에서 2011년 36.2%까지 가파르게 증가했다. 이는 세계 경제 환경이 나빠질 때마다 한국 경제가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었다. 1990년대 이후 발생한 경제 충격마다 가계에 고통을 전가한 결과, 외환위기 이전 5년간 가계당 실질 처분가능소득과 실질 가계소비지출의 연평균 증가율이 각각 4.8%와 7.1%였던 것에 비해, 외환위기 이후 27년간은 각각 0.7%와 0.8%로 급감하는 심각한 결과를 낳았다. 지난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가계의 소득과 소비는 억압되었고,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 가계부채가 ‘경제 모르핀’ 역할을 하며 소비와 성장 둔화를 가속화시키는 악순환을 만들었다. 2021년 4분기부터 가계부채가 감소세로 전환하고 지방 주택 및 상업용 부동산 시장이 침체하며 건설 투자 성장 기여도가 3년 6개월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하는 현상 또한 이러한 가계소비의 구조적 취약성과 무관하지 않다. 건설 투자 침체의 근원은 결국 가계소득의 억압에 있으며, 이는 가계소득 강화가 불가피함을 시사한다.
물론 소비쿠폰 지급과 같은 정책이 단기적인 소비 개선에 일부 기여할 수는 있다. 실제로 한국신용데이터(KCD)에 따르면 민생회복 소비쿠폰 배포 후 4주간 전국 소상공인 평균 카드 매출액이 작년 동기 대비 6.44% 증가하는 효과를 보였다. 하지만 이러한 1회성 정책은 ‘산소호흡기’ 역할에 그칠 뿐, 늪에 빠진 우리 경제를 근본적으로 살려내기에는 역부족이다. 더구나 국가 재정에 부담을 주어 소비쿠폰의 반복적인 지급은 어렵다. 따라서 재정 부담을 최소화하면서 정기적인 가계소득을 지원하고, 이 지원금의 일정 비율을 지역화폐로 지급하는 방안 도입이 시급하다.
정기적인 사회소득, 즉 ‘사회임금’ 또는 ‘사회소득’의 개념은 인간 사회의 근본적인 원리에 기반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생존과 번영을 위해 스스로 필요한 물자를 만들어내고, 그 생산의 결과를 배분한다. 이 과정에서 사회적 몫을 먼저 떼어내고 나머지를 각자의 기여도에 따라 개인 몫인 ‘시장임금’ 또는 ‘시장소득’으로 배분한다. 세금 형태를 띠는 사회 몫은 1차적으로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소득으로 배분되며, 사회 유지 및 운영 비용으로 사용된다. 개인 몫이 ‘돈의 힘’이 지배하는 시장에서 결정되는 반면, 사회 몫은 ‘1인 1표’ 원리에 기반한 민주주의 정치 영역에서 결정된다. 시장이 과잉되고 민주주의가 취약할 때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되는 반면, 정치가 과잉되고 시장이 죽으면 경제는 활력을 잃게 된다. 상극적인 동시에 상생할 수밖에 없는 시장과 민주주의라는 제도의 균형 속에서 현대 사회는 진보하며 황금기를 구가해왔다.
사회소득 수준을 국제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지표인 사회지출 규모를 보면, 2024년 기준 OECD 국가 중 오스트리아(31.554%)가 가장 높고 OECD 평균은 21.229%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15.326%로 하위 그룹에 속하며, OECD 평균보다 GDP 대비 5.903% 포인트, 금액으로는 151조 원이 부족하다. 이는 2024년 인구 기준 1인당 약 300만 원에 해당하며, 4인 가족 기준으로 연간 1200만 원, 월 100만 원의 격차이다.
이처럼 우리나라 가계 소비지출의 구조적 취약성은 사회소득의 절대적 과소, 시장소득에 대한 과잉 의존, 그리고 시장소득의 불평등한 분배에서 비롯된다. 2023년 국세청 통합소득 자료에 따르면, 소득을 창출한 2689만 명 중 상위 0.1%는 세후 월평균 실질수입이 1억 2215만 원인 반면, 중위 50%는 215만 원, 소득 창출 활동자 평균 월수입은 282만 원에 불과하다. 하위 41%는 최저임금 기준 월수입에도 미치지 못하는 끔찍한 불평등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은 ‘을’ 간의 갈등을 일상화하는 배경이 된다.
정기적인 사회소득 도입은 최저임금 인상 부담에서 벗어나게 하고, 사회소득의 일정 부분을 지역화폐로 지급함으로써 소상공인의 매출 및 수입 어려움을 크게 해소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기적 사회소득의 재원은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현 사회경제 상황에서 추가 세금 도입은 어렵다. 한국의 최고 개인소득세율은 49.5%로 OECD 국가 중 높은 편에 속하지만, 개인소득세가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7%로 하위 그룹에 속한다. 이는 표면상 높은 세율에도 불구하고 소득세가 제대로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네덜란드가 지니계수를 15% 포인트 개선하는 동안 한국은 7.2% 포인트 개선에 그치는데, 이는 많은 공제 혜택으로 인해 소득이 높을수록 세금이 제대로 부과되지 않기 때문이다.
2023년 국세청 자료에 따르면 약 1110조 원의 소득 중 약 410조 원이 공제 혜택을 받아 최종적으로 약 101조 원의 세금이 감면되었다. 공제 혜택은 소득 상위 0.1%에게 1인당 1억 1479만 원에 달하는 반면, 중위 50%는 276만 원에 불과하다. 지난해 세금 공제액은 110조 원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행 공제 방식을 모두 폐지하고 확보한 세금을 인적공제만을 기준으로 전체 국민에게 1/n로 배분하면, 4인 가구 기준 연 860만 원, 월 72만 원 지급이 가능하다. 세금 공제의 재분배는 재정에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전체 국민의 90% 이상이 순혜택을 보고, 소득이 낮을수록 순혜택이 증가하여 재분배 효과도 크다.
결론적으로, 불공정한 조세 체계를 수술하여 정기적인 사회소득 재원을 마련하는 것은 저소득층과 중산층 가구의 소득과 소비 지출을 강화하는 핵심 방안이다. 또한, 이러한 소득 강화는 기본사회, 기본금융 도입과 결합될 경우, AI 대전환 시대에 따른 창업 및 양질의 일자리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