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사회의 기후변화 대응과 통상 정책 연계 움직임이 가속화되면서 한국 기업들이 수출 경쟁력 확보를 위한 탄소 감축 전략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과거에는 느슨한 국제 규범 하에서 각국의 사정을 고려해 기후변화 대응 속도를 조절할 수 있었지만, 최근 국제 협력 기반이 약화되고 기후 위기가 심화되면서 미국과 유럽연합(EU)을 중심으로 기후 대응과 통상 정책을 연계하는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환경 규제 강화 차원을 넘어, 기업의 제품 경쟁력과 직접적으로 직결되는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기후-통상 연계의 가시화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2024년부터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시행으로 인한 투자가 본격화되고, EU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의 보고 의무가 시행되는 등 구체적인 이행 경과가 드러날 전망이다. 또한, 올해 1월부터 시행된 프랑스의 ‘전기차 보조금 개편안’처럼, 전기차 보조금 지급 시 자동차 부품 생산 및 완성차 조립 과정에서의 탄소 배출량이 적은 차량에 유리하게 규정하는 등, 수출 제품의 가치 사슬 전반에 걸쳐 탄소 배출량 측정 및 감축 노력이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즉, 원산지 증명이라는 기존 통상 기준에 탄소 배출량이 추가되면서, 한국 기업의 상대적인 탈탄소 속도가 수출 제품의 가격 경쟁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추세는 전기차나 철강 분야를 시작으로 다양한 제품 및 소재로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처럼 강화되는 기후-통상 연계에 대응하기 위한 핵심 수단은 바로 기후 기술 확보에 있다. 글로벌 기업들은 초불확실성 속에서도 에너지 전환 투자 전략을 유지하거나 오히려 더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기술 가격 하락과 확산의 선순환, 정부의 적극적인 산업 정책 지원, 그리고 새로운 시장을 선점하려는 강한 의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특히, 태양광 설비 가격이 지난 10년간 10분의 1 수준으로 하락하며 보급이 확산되는 것처럼, 기술 가격 경쟁력 확보는 재생에너지 보급 확대의 중요한 동인이 되고 있다. 또한, 미국 IRA나 EU 탄소중립산업법(NZIA) 등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은 탄소중립에 대한 경제성을 높여 관련 투자를 활성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 기업의 상황은 이러한 글로벌 흐름과는 다소 다른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고립된 전력망, 개방되지 않은 전력 시장, 그리고 제한적인 자연 자원 등으로 인해 글로벌 기술 가격 하락이 한국 기업들에게 충분히 와 닿지 않는 측면이 있다. 또한, 수출 지장 최소화를 위한 방어적 대응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어 탄소중립 투자 활성화로의 연계는 상대적으로 둔감한 상황이다. ‘first mover’보다는 ‘fast follower’ 전략에 익숙한 한국 기업들에게 새로운 시장 선점을 위한 투자는 다소 먼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 있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한국 기업들은 단기 감축 규제 및 기술 지원에 대한 정책적 시그널이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기후 기술 확보를 위한 투자 의사결정을 내려야 하는 어려운 현실에 놓여 있다.
이러한 불확실성을 완화하고 데이터 기반의 투자 의사결정을 돕기 위해 특허 빅데이터를 활용하는 방안이 제시되고 있다. 전체 기술 정보의 80%를 설명하는 특허 데이터를 기반으로 유망 분야 선정, 핵심 기술 파악, 접목 기술 색인, 기술 벤치마킹, M&A 타겟팅, 기술 가치 평가 등에 활용한다면, 기후 기술 확보 전략 수립 및 투자 의사결정 시 불확실성을 줄일 수 있다는 분석이다. 또한, 2050년 탄소중립 달성을 위해 필요한 기술 중 35%는 아직 시장에 출시되지 않았거나 시장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기술이라는 국제에너지기구(IEA)의 분석은, 아직 상용화되지 않은 기술 분야에서 시장 선점 기회가 여전히 열려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2023년 12월 두바이에서 개최된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 결과에 따른 국제사회의 요구 또한 무시할 수 없다. COP28 결정문에는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용량을 3배 확대하고 에너지 효율성을 2배 개선하는 등 온실가스 배출량을 감축하고 2050년 탄소중립을 달성하기 위한 합의 사항이 담겨 있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는 2024년까지 2030년 국가 감축 목표 달성 경과를 포함한 격년 투명성 보고서를 제출해야 하며, 2025년까지는 더 야심 찬 2035년 국가 감축 목표를 유엔에 제출해야 한다. 이러한 국제사회와의 약속 이행을 위해 한국 정부는 2024년 내에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 확정, 제4차 배출권거래제 기본계획 확정 및 할당계획 준비 등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따라서, 국제사회의 합의와 규제 강화는 한국 정부의 정책 변화를 초래하고, 이는 결국 기업에 대한 기후변화 대응 요구 증가로 이어질 것이다. 한국 기업들은 기후-통상 연계 강화, 기후 기술 경쟁 가속화, 그리고 한국의 특수성을 고려한 기후 기술 확보 방안을 면밀히 모니터링하며 전략을 지속적으로 갱신해야 한다. 나아가, 국내외 정책 및 전략 형성 과정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이해관계자와의 소통을 강화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시점이다. 모호한 정책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민간 실무 현황을 정부 및 입법 담당자들에게 정확히 전달하며, 고객사 및 공급망 파트너들과 전략적으로 협력하는 노력이 필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