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울산 장생포는 수심 깊은 바다와 풍부한 먹거리를 바탕으로 고래잡이 산업의 중심지였으나, 국제포경위원회의 결정으로 1986년 상업 포경이 전면 금지되면서 그 영광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장생포는 과거의 산업적 번영을 넘어, 사라진 산업과 생업, 그리고 포경선에 대한 애도와 향수의 정서를 담아내는 문화 공간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단순히 고래고기를 먹는 장소를 넘어, 한때 도시의 경제를 지탱했던 고래의 시간을 씹고 도시의 기억을 삼키며 공동체의 내일을 준비하는 공간이 된 것이다.
장생포는 예로부터 고래의 풍요로운 서식지였다. 신라시대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고래잡이 그림과 곳곳에서 발견되는 고래 뼈, 유물들은 이곳이 선사시대부터 고래가 모여들던 깊은 바다였음을 증명한다. 동해와 남해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며 태화강, 삼호강, 회야강 등에서 유입되는 풍부한 부유물과 플랑크톤은 새우를 비롯한 작은 물고기들을 불러 모았고, 이는 곧 새끼를 낳기 위해 장생포를 찾는 고래들에게 최적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 덕분에 장생포 앞바다는 대형 선박이 접안하기에도 용이했으며, 한때는 개가 만 원 지폐를 물고 다닐 정도로 경제적 번영을 누렸던 곳이다. 수출입품을 실어 나르는 대형 선박이 빼곡했고, 6~7층 규모의 냉동 창고들도 즐비했던 장생포의 모습은 그 시절의 번영을 짐작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 번영 뒤에는 개발과 산업화의 그림자도 드리워져 있었다. 1980년대 조성된 울산 온산국가산업단지에 제련소, 석유화학공장, 중화학 기업들이 집중되면서 구리·아연 제련소에서 배출된 중금속으로 인해 주민들이 ‘온산병’이라 불리는 중금속 중독 질환을 겪기도 했다. 쉼 없이 굴뚝이 매캐한 연기를 내뿜던 과거의 풍경은 이제 잊히고, 십여 년 전 경영 악화로 문을 닫았던 냉동창고가 2016년 울산 남구청에 의해 매입되어 2021년 ‘장생포문화창고’로 새롭게 개관했다. 이곳은 폐허가 된 공간을 시민들을 위한 복합 예술 공간으로 재탄생시킨 대표적인 업사이클링의 성공 사례라 할 수 있다.
장생포문화창고는 총 6층 규모에 다양한 체험장과 전시실을 갖추고 있다. 소극장, 녹음실, 연습실은 지역 문화예술인들의 거점이 되고 있으며, 특별전시관, 갤러리, 상설 미디어아트 전시관은 방문객들에게 다채로운 문화 경험을 제공한다. 특히, 2층 체험관의 ‘에어장생’ 프로그램은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재미를 선사한다. 정선, 김홍도, 신윤복 등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들의 작품을 거대한 미디어 아트로 재현한 ‘조선의 결, 빛의 화폭에 담기다’ 전시는 한국 전통 회화의 아름다움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하며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또한, 수십 년 된 냉동 창고의 문을 그대로 살려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독특한 공간을 만들어낸다.
무엇보다 장생포문화창고의 의미를 더하는 것은 2층에 상설 전시된 ‘울산공업센터 기공식 기념관’이다. 이곳은 울산 석유화학단지가 한국의 산업 심장부로서 ‘한강의 기적’을 선도했던 역사와 과정을 보여준다. 한강의 기적을 일군 산업 역군들과 그 시대의 어려움을 온몸으로 체험했던 부모 세대들에게는 더욱 애잔한 감회를 불러일으키는 공간이다. 과거에는 옳았지만 지금에는 틀린 일들을 배우며, 우리는 늘 지난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다.
이제 장생포의 고래고기는 단순히 식탁 위에만 남아있는 과거의 흔적이 아니다. 1986년 상업 포경이 금지된 이후, 장생포의 고래고기는 주로 혼획된 밍크고래를 합법적으로 유통하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천정부지로 치솟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희소성과 금지의 역설’은 고래고기를 더욱 욕망의 대상으로 만들고 있다. ‘일두백미’라 불리는 소처럼, 고래 한 마리에서도 최소 12가지, 더 세분화하면 스무 가지 이상의 다채로운 맛을 느낄 수 있다고 전해진다. 삶은 수육과 생회가 어우러진 모둠수육은 육고기와 닮은 듯하면서도 고유의 붉은 빛깔과 풍미를 자랑한다. 특히, 턱 아래 쭈글쭈글한 부채꼴 모양의 ‘우네’나 다섯 겹으로 이루어진 ‘오배기’는 고래고기 특유의 맛과 식감을 극대화하는 고급 부위로 꼽힌다. 부위마다, 조리법마다 소금, 초고추장, 고추냉이 간장 등 다양한 소스와 어우러져 다채로운 맛을 선사하며, 때로는 보쌈처럼 부드럽고 때로는 생 조갯살처럼 꼬들꼬들한 식감을 자랑한다.
장생포의 고래요릿집은 과거의 영광을 단순히 재현하는 공간이 아니다. 이곳은 사라진 산업, 사라진 생업, 사라진 포경선에 대한 ‘애도와 향수의 정서’를 담아내는 의례와도 같다. 고래로 꿈을 꾸었던 어부들, 고래고기로 단백질을 보충했던 이들, 그리고 한강의 기적을 일군 산업 역군들을 기리는 문화적 지층이 이곳에 녹아있다. 장생포의 고래는 사라졌지만, 그 기억과 정신은 고래고기라는 형태로, 그리고 장생포문화창고라는 공간을 통해 계속해서 우리 곁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우리는 이곳에서 고래의 시간을 씹고, 도시의 기억을 삼키며, 더 나은 공동체의 내일을 준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