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강화도는 그 자체로 거대한 방직 공장이자 직물 유통의 중심지였다. 1933년 ‘조양방직’ 설립 이래 1970년대까지 60여 개가 넘는 방직공장이 성행했으며, 4,000명에 달하는 직공들이 밤낮으로 일했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하지만 이러한 강화 직물 산업의 흥망성쇠 뒤에는 억척스럽게 생계를 이어온 여성들의 땀과 눈물이 서려 있었다. 최근 ‘강화소창체험관’과 ‘동광직물 생활문화센터’의 개관은 단순히 옛것을 보존하는 것을 넘어, 그 속에 담긴 역사와 문화를 재조명하며 당시 여성들의 삶의 방식과 애환을 풀어내는 계기가 되고 있다.
강화 직물 산업의 핵심에는 ‘소창’이라는 천이 있었다. 목화솜에서 추출한 실로 짠 소창은 옷감, 행주, 그리고 특히 기저귀 감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등지에서 면화를 수입해 오던 강화는 수원과 함께 전국 3대 직물 도시로 명성을 떨쳤다. 당시 방직 공장은 후한 임금을 제공했기에, 열댓 살 어린 소녀들에게도 꿈의 일자리였다. 12시간씩 이어지는 주야간 교대 근무 속에서 먼지 날리는 작업 환경을 견디며 그들은 생계를 책임졌다. 이러한 억척스러운 여성들의 손길은 강화의 또 다른 특산품인 화문석(꽃무늬를 놓은 자리 꽃돗자리) 제조에도 이어졌다. 강화 왕골로 짠 화문석은 뛰어난 기품과 실용성을 자랑하며 고려 시대부터 외국에 수출되거나 사신에게 선물될 만큼 귀한 대접을 받았다.
소창 직물을 만들기 위한 과정은 수작업의 정성과 시간의 집약이었다. 수입된 원사 형태의 면사를 풀어 타래를 만들고, 본래 약간 누런 색을 띤 목화 실을 가마솥에 끓여 표백 과정을 거친 후 옥수수 전분으로 풀을 먹여 건조하는 단계를 거쳤다. 날씨에 따라 사흘에서 일주일까지 소요되는 건조 과정을 거쳐 뽀얗고 부드러워진 실을 씨실과 날실로 나누어 베틀에서 교차시켜 평직물로 완성했다. 이러한 모든 과정을 거쳐 탄생한 소창은 그대로 판매되는 것이 아니라, 강화 여성들의 또 다른 생계 수단이 되었다.
직물 완성 후, 강화 여성들은 직접 이 방직물을 둘러매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판매에 나섰다. 중간 상인 없이 직접 판매하며 마진을 높였고, 가까운 북한 개풍 지역까지 왕래하며 판로를 개척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천 쪼가리뿐만 아니라 앞치마에 강화 새우젓을 싸 가지고 다녔다. 밥 한 덩이를 겨우 얻어먹으며 쉰밥, 찬밥에 곁들일 유일한 반찬이 바로 강화 새우젓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짠맛이 강하기보다 들큼하고 담백한 강화 새우젓은 전국 물량의 70~80%를 담당하며 서해안 지역의 중요한 특산물이자, 강화 여성들의 고된 삶을 버티게 해준 힘이었다.
강화 새우젓은 그 자체로도 귀하지만, 이를 활용한 향토음식 ‘젓국갈비’는 그 가치를 더욱 빛낸다. 젓국갈비는 이름과 달리 갈비, 호박, 두부, 배추 등 다양한 재료가 어우러지지만, 그 모든 맛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바로 새우젓이다. 새우젓에서 우러나오는 짭짤하면서도 깊은 감칠맛은 재료 본연의 단맛과 구수한 맛을 끌어올리며, 인공적인 맛으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오묘하고도 슴슴한 맛을 완성한다. 굳이 자극적인 맛을 내세우지 않아도, 재료들의 맛이 둥글게 어우러져 먹고 나면 속이 편안하고 부드러운 이 음식이야말로 ‘대미필담(大味必淡)’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한다.
오늘날 ‘강화소창체험관’과 ‘동광직물 생활문화센터’는 과거 강화 직물 산업의 흔적을 보존하고, 당시 여성들의 억척스러운 삶과 그 속에 담긴 애환을 되새기게 하는 중요한 공간이 되고 있다. 쉰밥, 찬밥에 요긴했던 새우젓, 그리고 아기 기저귀를 빨아 삶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르는 소창의 역사는 우리네 인생이 얼마나 애잔하면서도 아름다운지를 다시 한번 느끼게 한다. 이렇듯 강화는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잊히고 있던 과거의 숨결과 그 안에 담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깊은 감동과 성찰을 선사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