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관광의 중심지로 여겨졌던 유채꽃과 벚꽃 만발한 봄날의 풍경이 이제는 과거의 영화가 되어가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해외여행 수요가 증가하면서 과거처럼 제주를 찾는 발걸음이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높은 물가와 같은 몇 가지 제약 요인에도 불구하고 제주는 여전히 국내 여행 1번지라는 이름값을 하고 있지만, 그 매력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특히 제주 고유의 가치를 담고 있는 ‘용머리해안’은 십 년 만에 다시 찾은 이들에게도 그 진가를 온전히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
용머리해안이 자리한 서귀포시 안덕면의 산방산은 설문대 할망 신화의 배경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한라산보다도 먼저 생성된 화산체다. 더 나아가 용머리해안은 산방산과 한라산보다 앞서, 심지어 제주 본토가 형성되기 훨씬 이전에 만들어진 약 100만 년 전의 화산 활동으로 탄생한 태곳적 땅이다. 얕은 바다에서의 화산 폭발이 간헐적으로 반복되며 화산재가 겹겹이 쌓이고, 이후 바닷물과 바람에 깎여 나가면서 용머리해안은 제주의 지질학적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귀중한 유산이 되었다. 이러한 역사를 지닌 용머리해안은 매일 오전 9시부터 개방하지만, 바닷물이 빠지는 물때와 날씨의 영향을 받기에 입장을 위해서는 반드시 관광안내소에 미리 확인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바위가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용머리해안은 진시황이 불로장생의 명약을 구하기 위해 보낸 사자로부터 제주 혈맥을 끊으려 했던 전설이 깃든 곳이다. 이 비극적인 이야기는 산방산의 절규와 눈물을 밟고 서 있는 듯한 오묘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용의 피가 솟구쳐 만들어졌다는 기암절벽은 물론, 화산 폭발 당시 증기가 빠져나가며 생긴 구멍 뚫린 자국과 시루떡처럼 층층이 쌓인 화산재 지층은 제주의 최초 속살을 만나는 듯한 경이로움을 선사한다. 검은 현무암과 옥색 바다가 기묘하게 어우러진 풍경 속에서 100만 년 세월의 장엄한 무게를 느낄 수 있으며, 파도가 만들어낸 해안 절벽과 오랜 세월 쌓여 만들어진 사암층은 그 자체로 압도적인 장관을 이룬다.
이러한 태고의 땅, 용머리해안을 제대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곳에서 자연이 빚어낸 풍경 앞에 서면 짧디짧은 인생이 얼마나 겸손해져야 하는지를 깨닫게 된다. 1시간가량의 트레킹을 마치고 나면, 제주라는 땅과 가장 잘 어울리는 음식으로 ‘고사리해장국’을 떠올리게 된다. 물과 곡식이 부족했던 척박한 제주 땅에서 오랜 세월 생계를 책임졌던 두 가지 작물, 바로 고사리와 메밀이다. 특히 길고 튼튼한 뿌리로 화산암에서도 잘 자라고 빗물을 저장했던 고사리는 제주 생태계와 식재료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독성이 있지만 삶고 말리는 과정을 거쳐 독성과 쓴맛을 제거한 고사리는 제주 사람들에게 귀한 식재료였으며, 제사상이나 명절에도 빠지지 않았다.
제주 사람들의 ‘소울 푸드’인 고사리해장국은 돼지를 이용한 육수를 기반으로 한다. 잔치 때 잡은 돼지의 뼈로 곤 육수는 모자반을 넣으면 ‘몸국’, 뼈를 넣으면 ‘접작뼈국’, 그리고 고사리를 넣으면 ‘고사리해장국’이 되는 것이다. 육개장에서 소고기를 대신하는 고사리는 메밀가루와 어우러져 걸쭉하면서도 은은한 감칠맛을 자랑한다. 비록 메밀가루 때문에 다소 거무튀튀한 빛깔이지만, 한 숟갈 뜨면 구수한 고사리와 메밀의 조화로운 맛이 혀를 부드럽게 자극한다. 제주 사투리로 ‘베지근하다’고 표현되는 이 맛은 기름지면서도 담백하며 속을 든든하게 채워주는 깊은 풍미를 지니고 있다. “국물맛이 베지근하우다!”라는 말은 맛을 제대로 칭찬하는 최상급 표현이며, 밥 한 공기를 말아 먹으면 마치 죽처럼 되직해져 입에 걸리는 것 없이 술술 넘어간다. 가난과 통한의 역사 속에서도 이처럼 담백하고 유순한 맛을 낳은 제주 사람들의 삶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용머리해안을 바라보며 먹는 고사리해장국은 100만 년 제주의 역사를 맛보는 듯한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