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경제적 문제만큼이나 부부 간의 화목이 중요하게 대두되고 있지만, 많은 부부가 이 문제에 대해 충분히 준비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퇴직한 남편이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발생하는 갈등은 이미 일본에서 심각한 사회 문제로 인식되었으며, 국내에서도 그 조짐이 빠르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부부 갈등은 중년 및 황혼 이혼율 증가의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실제로 퇴직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한 퇴직 수기 공모에서 많은 이들이 퇴직 후 ‘절벽 위에 서 있는 기분’이라고 토로했다. 갈 곳이 없다는 점이 가장 큰 어려움으로 꼽혔으며, 한 고위직 공무원은 퇴직 후 3개월간 집에 머물며 아내의 눈치를 보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밝혔다. 집안일에 서투른 잔소리로 아내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사소한 실수로 핀잔을 들으며 서글픔을 느끼는 남편의 모습은 부부 간 불편함을 가중시킨다. 여성 참여자들 역시 퇴직한 남편의 수발을 들어야 하는 부담감과 속박감을 느낀다고 답하며, 남편의 서투른 집안일과 잔소리가 짜증을 유발한다고 지적했다.
우리보다 20년 앞서 고령사회에 진입한 일본에서는 이미 수년 전부터 남편 퇴직 후 부부 갈등이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었다. ‘남편재택 스트레스 증후군’이라는 용어가 생겨날 정도로, 퇴직한 남편의 존재 자체가 아내에게 심각한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건강 이상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는 ‘부원병(夫源病)’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러한 갈등의 배경에는 한국과 일본의 부부 문화가 자리하고 있다. 남편이 현역으로 활동하는 동안 부부는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퇴직 후 갑작스럽게 남편이 집에 머무르면서 이전에는 신경 쓰이지 않았던 남편의 성격이나 생활 습관이 아내에게 스트레스 요인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전체 이혼 건수 중 혼인 지속 기간 20년 이상인 중년·황혼 이혼의 비율이 1990년 14%에서 2023년 23%로 증가했다. 퇴직 후 부부 갈등이 이혼의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일본의 노후설계 전문가들은 퇴직을 앞둔 부부들에게 퇴직 후 부부 화목을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일 것을 조언하며, 낮 동안에는 가능한 한 부부 각자 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것을 권유한다. 인기 있는 남편의 조건으로 ‘낮에는 집에 없는 남편’을 꼽을 정도이다.
우리나라 역시 남편 퇴직 후 부부 갈등 문제가 빠르게 사회문제로 부상하고 있다. 지난 이십수 년간 이혼율은 꾸준히 낮아졌지만, 전체 이혼 건수에서 중년·황혼 이혼이 차지하는 비율은 1990년 5%에서 2023년 36%로 급증했다. 이러한 증가 배경에는 퇴직 후 부부 갈등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언론 보도나 노후설계 강의 현장에서도 퇴직 후 부부 갈등에 대한 고민을 쉽게 들을 수 있다.
따라서 퇴직 후 노후자금 마련만큼이나 부부 화목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 부부 모두가 낮 동안에는 수입을 얻는 일, 사회공헌활동, 취미활동 등 각자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는 퇴직 후에도 건강하고 행복한 노후를 보내기 위한 필수적인 준비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