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인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봄꽃이 만발한 제주를 향한 그리움이 깊어진다. 하지만 최근 제주 관광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해외여행 수요 증가로 예전 같지 않은 상황에 직면했다. 국내 여행 1번지로 불리던 제주는 높은 물가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관광객 감소라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제주의 독보적인 매력 중 하나인 ‘용머리해안’은 여전히 그 가치를 빛내고 있다.
용머리해안은 100만 년 전, 얕은 바다에서 일어난 화산 폭발로 형성된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땅이다. 이곳은 단 한 번의 분출이 아닌, 간헐적인 수성화산 분출이 여러 차례 반복되며 형성된 독특한 지질학적 특징을 보여준다. 화산재가 쌓이고 깎여나가는 과정을 거치며 형성된 용머리해안의 다양한 지층은 과거 제주가 겪었던 격변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파도에 깎여나간 화산체와 수증기를 타고 날아온 화산재가 다시 쌓인 결과물로서, 이곳의 풍경은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한 경이로움을 선사한다. 검은 현무암과 옥색 바다가 어우러진 이곳에서 마주하는 100만 년 세월의 무게는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는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용머리해안은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와 화순리 경계에 위치하며, 바위가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의 영험함에 대한 옛 이야기도 전해진다. 진시황이 이곳의 기운을 끊기 위해 보낸 사자가 산방산의 영기를 끊고 용의 허리와 꼬리를 잘랐다는 전설은, 용머리해안과 산방산이 지닌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욱 깊게 한다. 절규와 눈물을 밟고 서 있는 듯한 오묘함 속에서, 작열하는 용암의 증기가 빠져나가며 생긴 구멍 뚫린 자국과 시루떡처럼 층층이 쌓인 지층은 제주가 품은 태곳적 속살을 만나는 듯한 황홀경을 안겨준다.
이처럼 억겁의 시간을 견뎌온 용머리해안을 제대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바닷물이 빠지는 물때에 맞춰 방문해야 하며, 날씨가 좋지 않으면 출입이 제한될 수 있어 관광안내소에 입장 시간을 확인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미끄럽지 않은 편안한 신발을 착용하고, 1시간 남짓 걸리는 용머리해안을 탐방하며 거대한 자연 앞에서 겸손함을 느낄 수 있다.
용머리해안 탐방 후, 이 땅과 가장 잘 어울리는 음식으로는 고사리해장국을 빼놓을 수 없다. 화산섬 제주는 물과 곡식의 부족으로 척박한 환경이었으나, 고사리와 메밀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 제주를 오랫동안 먹여 살린 귀한 작물이었다. 다년생 양치식물인 고사리는 척박한 화산암에서도 뿌리를 단단히 내리고 빗물을 저장하는 강인함을 지녔으며, 이는 제주의 생태계와 식재료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독성이 있는 고사리는 예부터 삶아 말려 독성과 쓰린 맛을 제거한 뒤 일 년 내내 즐겨온 귀한 식재료였다.
제주 사람들의 ‘소울푸드’인 고사리해장국은 돼지고기 육수를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돔베고기를 만들고 남은 뼈로 곤 육수에 고사리를 넣어 끓이면 고사리해장국이 되는 것이다. 육개장의 고사리가 소고기를 대신하는 것처럼, 제주에서는 메밀가루를 더해 걸쭉하면서도 감칠맛 나는 고사리해장국을 만들어냈다. 겉보기에는 메밀가루 때문에 약간 갈색빛을 띠지만, 한 숟갈 떠먹으면 구수한 고사리와 메밀의 조화로운 맛이 혀를 부드럽게 자극한다. 메밀 전분이 풀어져 걸쭉해진 국물은 자극적이지 않고, 제주 사투리로 ‘베지근하다’고 표현되는 깊으면서도 담백한 맛을 자랑한다. ‘베지근하다’는 말은 기름진 맛이 깊으면서도 담백할 때 쓰는 표현으로, 속을 든든하게 채워준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밥 한 공기를 말아먹으면 더욱 걸쭉해지는 고사리해장국은 입에 걸리는 것 없이 술술 넘어가 마치 죽처럼 부드럽다. 가난과 통한의 역사를 살아온 제주 사람들이 결국 이토록 담백하고 유순한 맛을 낳았다는 점은 깊은 울림을 준다. 용머리해안을 품은 제주의 풍경 속에서 고사리해장국은 단순한 음식을 넘어, 그 땅의 역사와 사람들의 삶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100만 년의 세월을 간직한 제주의 땅과, 그 속에서 피어난 고사리해장국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깊은 감동과 성찰을 선사한다.